-
눅23:26~43 대비되는 두 부류, 나는 어느 편인가?신약 강해/4복음서 2021. 9. 15. 16:28
눅23:26~43 대비되는 두 부류, 나는 어느 편인가?
정치적으로 좌파 우파, 진보와 보수가 있는데 내가 속한 편이 아니면 다 잘못되었다는 극단적인 편견의 시대입니다. 신학에서도 자유주의 근본주의, 알미니안 칼빈주의 등으로 나누어 서로를 공격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현대교회는 교파적인 싸움이 없어진것은 다행이나 그러다 보니 신학의 정체성이 확고하지 못하고 여러세상의 문제앞에 교회가 정답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안타까운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막바지를 향해서 나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눈앞에 왔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잡히셔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공회로, 빌라도재판장으로 헤롯에게로 그리고 다시 빌라도에게 와서 마지막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갈보리동산으로 올라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의 과정이 숨가쁘게 너무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 계속적으로 두 부류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하고 죽이라고 목소리를 외치는 무리들, 또 한편은 눈물로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 십자가위에서마저 한편 강도는 주님을 조롱하고 저주하고 다른 한편은 주님을 옹호하고 자기의 영혼을 부탁하는 사람…이렇게 나누어지는 부류속에 나는 그리고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1. 어떤 공격속에서도 진리인 주님을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산헤드린 공의회가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하늘에서 왔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메시야 그리스도다라는 예수님의 나타내심을 보고 신성모독으로 사형판결을 내립니다. 당시대 석학이요 종교지도자들이요 지도층이 잘못되었다고 외치는이 소리에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뛰어난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부족해도 뭘 잘몰라도 주님이 진리라는 확신이 오면 그것을 끝까지 붙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23장1절,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고, 23: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 사람을 없이 하소서 외쳐도… 무리 다수에 흔들리지 말고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다수에 묻히고, 우리의 소리가 힘이 없을지라도 그래도 주님을 부르짖고 주님을 붙잡는것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다수의 의견을 따르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일지라도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으며 죽을지라도 주님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요즘 어떻습니까? 다수가 교회를 욕하고, 공격합니다. 정부가 교회를 탄압하는 듯한 그런 모습이 보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믿음을 포기할 수 없으며, 교회문을 닫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수가 그럴지라도 그래도 나는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당당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의 빛이고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마저 믿음을 포기한다면 이 세상은 캄캄한 암흑일뿐입니다.
2. 눈물을 흘리는 제목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십니다.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는 길, 고난의 길입니다. 이 길을 같이 따라주는 무리가 있습니다.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메고 가는 구레네사람 시몬…그래도 주님과 같이 걷는 길입니다. 27절,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기간 육체의 질병을 치유해주시고,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진리를 주신 주님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눈물로 주님과 함께 그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고 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28절,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무엇을 우는지 주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무엇때문에 울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해주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주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것…이것은 주님이 예수님은 구속사적 의미에서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강제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차례 당신의 고난 받으심을 예고 하셨습니다. 마 16: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예수님은 자원해서 대속의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계십니다. 물론 주님을 보며 울고 있는 여인들은 이 고난의 깊은 의미를 모를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이 겉으로 볼 때는 패배의 길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죄와 사망을 이기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자신을 위하여 울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코 당신을 위한 동정의 눈물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울어야할 대상을 수정해 주셨습니다. 진정 슬퍼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울어야 할 대상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 여인들 자신과 그들의 자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지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왜 자신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하지요? 무서운 심판과 재앙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심판과 재앙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재앙을 받지 않으려면 자신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 다가오는 큰 비극의 날을 깨닫고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에이디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죄를 범하고도 죄를 알지 못한 우리 자신을 보고 통회 자복해야 하고, 자녀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고 처절하게 눈물흘려야 하는 겁니다. 우는 대상을 바로 알고 눈물흘릴 때, 시126:5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3. 주님의 십자가 좌우편이 날마다 우리 마음에 있음을 기억하시고, 주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날 구원하소하는 기도가 날마다 있어야 합니다.
모진 수치와 조롱을 당하신 후에 우리 주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다른복음서와 달리 십자가상에서 외치는 특별한 내용이 있는데요. 첫번째는 34절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자신을 모함하고 부당하게 사형을 집행하고 온갖 수치와 조롱을 한 이들을 향하여 저들을 멸하여 주십시오가 아닌…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죄사함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 십자가에서 죽으신 본질이 무엇입니까? 죄사함입니다. 주님이 저들을 사하여 달라는 기도청원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기도의 폭이 어떠해야할까요? 죄사함의 영역 어디일까요? 어떤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우리가 죄사함의 영역을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한다면 죄사함은 주권은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죄를 범할때 이것이 죄인지 알지 못하고 한다고 하잖아요?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들의 머리, 지식, 눈, 전인격이 두꺼운 막에 덮여 있는것처럼 가리워져 있어서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적하는 그들, 교회를 대적하는 그들을 주님처럼 주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저들이 알지 못해서 저러나이다!
우리의 할일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데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까?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에 있는 강도가 모델입니다. 둘 다 이 땅에서 죽을 죄를 지은 흉악한 강도들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의하면 저들이 알지 못하고 행한 죄들입니다. 한 편 강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향하여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면 우리를 구원해봐라 하면서 밑에서 조롱하는 무리들과 똑같이 주님을 비방하고 비난합니다. 이 사람은 끝까지 주님을 부인한자…끝까지 악에 악을 더한 자, 죽음에 죽음을 더한 자, 끝까지 고집을 부린 자..끝까지 자기 맘대로 사는 자…결국이 어떻게 될 지 뻔합니다. 그런데 한 편 강도, 이 땅에서 똑같이 흉악한 죄를 지어 십자자 처형을 받은 강도입니다. 주님옆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40-42절, 그리고 42절,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주님께 주님의 나라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주님을 붙잡고, 주님께 영혼을 맡기는 모습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43절,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최고의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이 축복은 주님을 비방한자에게는 해당없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은 저주와 함께 떠나갔지만, 다른 한 사람은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오늘..이 믿음의 시간은 오늘 현재입니다. 곧 지금이라는것이지요. 그러므로 십자가위에 마지막 호흡을 하고 있는 고통의 순간이지만, 주님을 영접한 그 순간부터는 이제 다른 세상입니다. 그 세상을 우리는 하나님나라라고 하고, 낙원이라고 하고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이기고, 고난시련 환난을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축복을 아는 사람, 누가 뭐라고 해도, 다수의 목소리가 크다고 해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할수 없습니다. 주님을 내려놓은 순간, 이 복을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 주님을 비방하는 한편의 강도같은 마음이 있고, 주님을 붙잡고 주님께 맡기는 한편의 강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늘 선택의 연속인것이지요. 이때 갈보리 십자가 위에 나를 위해서 나의 죄를 위해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나의 중보자시며 나의 주인이신 주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보고 계신다를 기억하시고 주님을 고백한 한편의 강도편에 서서 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신약 강해 > 4복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눅24:36~53 부활의 능력, 부활의 소망 (0) 2021.09.15 눅23:44~56 십자가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0) 2021.09.15 눅22:66~71 하나님 권능의 우편을 보라 (0) 2021.09.14 눅22:1~13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라 (0) 2021.09.14 눅20:45~21:6 가난한 과부의 헌금(헌금의 목적) (0) 2021.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