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은 개인적인 고백과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죄사함, 몸의 부활, 영생은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입니다. 죄를 누구에게 적용을 해요?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 죄가 먼저 고백되어야, 인정되어야, 죄사함, 사면이 이어지는 거죠, 불신자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러면 수긍하던가요? 내가 왜 죄인이야!! 생사람 잡지 마세요~나는 죄가 없어!!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인정을 하지 않고, 감사를 모릅니다. 반대로 예수믿는 사람은 나같은 죄인 살리신…죄인중에 괴수…라고 고백하지요. 오늘 사도신경의 개인적 고백인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에 대한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을 깨닫는 시간, 그리고 죄사함의 기쁨이 회복되는 시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나는 죄인입니다! 왜 죄인인가?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다! 3:9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아래에 있다! 20절에는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 태어나자마자 죄인, 아뇨 다윗은 시51편5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사람이 왜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롬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마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의 출발선이 있다는 겁니다. 한 사람, 때문에…그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 잘 알잖아요? 처음 사람 아담입니다. 아담의 선악과 사건,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말씀, 그 말씀을 거역함로, 배반하므로, 지키지 못하므로, 죄가 들어오고, 죄의 열매, 죄의 결과인 사망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죄로 그 후손은 문자적으로 똑같은 죄 선악과를 먹지 않았음에도 죄인이 된것입니다. 그래서, 태아가 신생아가 죄를 지은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되어 사망이 왕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항변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신앙은 나는 죄인입니다로 출발하는 겁니다. 죄인의 비참함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열매들을 보십시오, 악, 악한 마음, 악힌 행실, 시기 질투, 수군수군, 비방, 교만, 배약, 무정, 무자비등등…요즘 사건사고들 보세요. 입에 담기도 무서운 잔혹한 사건들이 많잖아요.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에 있고, 어떤 사람은 행동으로 나타나고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에 품고 있는 겁니다. 오죽하면 선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겠습니까? 잔인한 마음만 있습니까? 비참한 삶, 생활도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 시대, 소상공인들의 삶이 그렇지 않을까요?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 두려움에 있는 분들은 또 어때요? 마음에 평안이 있겠어요? 대표적인 모델을 성경에서 찾으라 하면 구약에 다윗이 아닐까요? 왕이 되어 모든 것을 다 누리는 사람, 성공의 모델 같지만, 밧세바와의 범죄이후, 시51편에서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그러면서 내 죄악을 지워달라고 처절하게 부르짖잖아요! 신약의 바울은 어때요?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죄의 실상은 삶은 어떨까요?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보세요. 아담과 하와, 그리고 두 아들 가인과 아벨…얼마나 행복한 모습, 단란한 모습입니까? 그런데, 장남 가인이 동생 아벨을 비참하게 죽이고 도망가는 가인의 모습…아담과 하와의 처절한 눈물…선하잖아요. 죄의 열매입니다. 눅15장의 둘째 아들은 어때요? 살아계신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달라고 하는 모습부터가 불효잖아요. 그많은 유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결국에는 돼지의 쥐엄열매를 먹는 모습, 아버지 떠난 것이 어떤 결과를 주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이렇게 비참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버지를 떠남, 하나님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 품을 떠나 자기 혼자 스스로 살겠다고 하는 것, 죄인을 고백하지 않고 내가 무슨 죄인이야, 하면서 큰소리 치는 것,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맘대로 사는 것 이런 것이 죄입니다. 이 죄의 결과 사망이 왕노릇, 누구나 죽을 수 밖에 없는것…그래서 사망의 무거운 짐을 벗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2. 어떻게 하면 죄를 사면받을 수 있나요? 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있습니까? 죄문제를 가지고 몸부림친 사람을 꼽으라 하면 수도사이며 종교개혁자인 루터입니다. 로마카톨릭은 죄사함을 받으려면 필사적인 인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번째 요구가 금욕생활이지요. 루터가 수도원에서 철저한 금욕생활을 살아봅니다. 그런데 오히려 마음에 욕망이 더 꿈틀되더라는 거지요. 금욕생활로 죄문제, 죄의 욕망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두번째 잉여공로설에 의지하는 것인데, 잉여공로설이란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성자 사제들이 쌓은 선행의 공로를 힘입으면 형벌이 면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받으려면 면죄부를 돈을 주고 사는 것이죠. 이렇게 해본들 오히려 죄책감에 떨게 되고 해결이 안되더라는거죠. 세번째가 고해성사인데 루터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번씩 죄가 생각나는대로 고해를 했다고 합니다. 어떤때는 내리 6시간이나 하면서 영혼을 샅샅이 뒤지고 기억을 이 잡듯이 털면서 죄를 생각해 내어 고해를 했는데, 이때 스타우피츠 수도원장이 이런 시시껄렁한 죄를 가져오지 말고 좀 굵직한 죄를 가져와 사죄를 받게 하더라는 겁니다. 루터의 마음은 고해를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죄에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죄를 끄집어 내는데 생각해내는데 자신의 검열을 빠져나가는 쥐새끼같은 수많은 죄가 있음을 깨닫고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면서 얻은 결론이 롬1: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죄사함은 고해성사가 아니라, 잉여공여설, 면죄부사는것이 아니라, 고행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구나! 하면서 죄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로마카톨릭의 개혁의 불을 불태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사함의 근거, 믿음,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롬5:1절,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 무엇인지 십자가 복음, 장사복음, 부활복음에서 배웠지 않습니까? 나 위해, 나를 살리시기 위해, 나의 죄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내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시어 우리를 살려 주셨다! 이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 진다 예수님의 의로 의롭다되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롬5:17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룻했었는데, 예수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의의 선물과 생명안에서 왕노릇하며,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순서대로 성부 성자 성령 교회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짓지도 않은 죄라고 항변했었는데 태어나자마자 죄인이 되었었는데, 반대로 의인이 되는 것…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역시 너무나 쉽습니다. 단번에 해결되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요 복음입니다. 루터처럼 우리가 다 죄를 끄집어내지 못해도…우리가 걸려내지 못해도…하나님이 우리가 걸려내지 못한 죄를 보시고 죄인이라하지 않으시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 십자가의 보혈과 의롭다하심의 의의 옷, 우리안에 부어진 성령, 예수의 영을 보시고 …내 아들이라 하시는 겁니다.
3.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느냐 그러면 이웃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지난 주 성도의 교제, 교통을 배웠지 않았습니까? 이웃과의 교제 수평적 교제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 용서를 받았느냐 그러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어느정도까지 용서할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마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것을 문자적으로 490번이 아닌것은 아시지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잖아요? 이어서 만 달란트 빚진자 이야기를 하십니다. 값을 수 없자 주인이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엄명을 합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이 만달란트입니다. 빚진자는 절망입니다. 이 때 주인이 마18:27절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줍니다. 이말이 빚진 자에게는 소망이고 복음입니다. 그래서 절망이 희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통곡이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세상 살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한테 백데나리온 빚진자를 만난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했다고 그래요?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압박합니다. 참아달라고 사정하는데도 불구하고 옥에 가둬버립니다. 이 소리가 주인에게 들어갑니다. 주인이 그러잖아요…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 큰 죄들을 우리 주님이 다 대신 갚아주셨잖아요. 이 은혜를 모르면, 이 죄사함의 기쁨을 모르면, 위의 빚 탕감받은 자 처럼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은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아나니아처럼 할 수 있습니다. 행9:17절, 믿는자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사울이 앞을 보지 못하고 있을 때…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하면서 기도해줍니다. 스데반은 어때요? 자신을 향하여 돌던지는 원수들을 향하여,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것이 바로 일곱번을 일흔번씩 용서하는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용서가 능력입니다. 죄사함의 기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면 느낄수록 용서의 힘이 더 커집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