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막바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데요. 개인적인 고백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죄사함)과 몸이 다시 사는 것(몸)의 부활과 영원히 사는 것(영생)을 믿사옵나이다입니다. 특히 오늘은 몸이 다시 사는 것, 육체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능력이 얼마나 큰 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고 더욱 더 주님과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믿음이 더욱 굳세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 우리의 신앙이 삶과 어떻게 잇대어 있는지 깨닫게 해주십니다. 뉴우스나 유튜브에 온통 무속이야기잖아요. 선거철만 되면 나오는 말이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되면 교회를 핍박하기 때문에 진보를 선택하지 않고 오로지 반공 멸공에 투표한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대통령까지 이 시대에 교회가 탄압을 받고 교회가 무너졌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만약에 무속이 정치에 관여하고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무속의 점괘에 움직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날이 바로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는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습이요,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때 예루살렘성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울서신을 보아도, 핍박이나 환난이 오면 오히려 기뻐했고, 반대로 성경적지 않은 이단사상이나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격하는 것을 밝히 알면서도 선거철만 되면 믿는자들이 판단이 흐려지는 것을 볼때 너무도 안타까운 것입니다. 성경적 가치관 정체성이 바로 세워지면 믿는 자가 정치와 사회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 것인지 분명합니다. 특히 오늘 사도신경의 고백 몸이 다신 산다는 육체의 부활의 진리가 세워지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분명합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까?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까?
1. 몸이 다시 산다는 육체의 부활은 반드시 죽음을 전제합니다. 죽어야 다시 살지요. 오늘 본문 살전4:13,14절에 자는 자들이라는 이 의미는 죽음을 말합니다. 또, 히9:27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죠. 이처럼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습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이 죽음은 완전한 죽음입니다. 죽음을 이야기할 때 영적인 죽음, 육적인 죽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엡2:1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는 이 표현은 살아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로 영적인 죽음이라고 하고, 호흡이 끝나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죽음 육체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이 육체적인 죽음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지요. 이 죽음을 바라볼 때, 죽음 앞에서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믿음이 보이는 것입니다. 죽는 사람이 영원한 불못에 빠진다면 얼마나 애통하겠습니까? 반대로 죽어서 주님나라에서 부활해서 행복한 모습이 보인다면 그 나라에 나도 빨리 가고 싶다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제가 아는 분도 남편목사님이 코로나로 돌아가셨는데 하나님나라에서 거니는 모습을 보고 애통 슬픔이 덜어지더라는 겁니다. 이런 것처럼 죽음이후의 어떤 모습을 믿음으로 가지고 있다면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이 세상보다 주님나라가 훨씬 더 좋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 세계를 향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개똥밭에 구르더라도 이승이 좋다고 하잖아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주님 다시 곧 오신다는 재림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기다려도 주님 오시지 않고, 주님 기다리던 분들이 하나 둘 씩 죽음을 맞이하는 겁니다. 그래서 슬퍼하고 심히 애통해하는데, 단지 이 땅에서 다시 보지 못한다는 슬픔때문이 아니라, 재림하기 전에 죽은자들은 주님 재림하실 때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확신때문에 과하게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살전4:14 예수안에서 자는 자들도 예수믿고 죽은 자들을 말하잖아요 이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재림하시는 주님과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주의 재림이 있고, 그 다음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선포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을 위해서 너무 가슴아파하지 말라, 주님 재림 때 다시 일어나리라 아멘, 다시 산다는 육체의 부활은 이처럼 죽음이후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몸의 부활을 믿는 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이며, 예수님의 부활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믿음이 있기때문에 죽음을 그렇게 슬퍼하지 않는 겁니다. 성경에 다윗이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보십시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죽는 다는 심판의 메세지를 나단선지자에게 듣습니다. 이때 다윗의 행동을 보십시오. 삼하12: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러다 아들이 7일만에 죽습니다. 살아있을때도 저렇게 힘들어하셨는데 이제 아들이 죽었으니 상심이 얼마나 클까 하고 신하들이 걱정하는데 죽었다는 소식에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먹었다…이 모습을 보니 조선시대 우리나라와 완전 반대아닙니까? 우리 조상들은 죽으면 3년상을 치른다고 무덤을 지키고 살았잖아요. 다윗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삼하12: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돌아오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죽으면 그에게로 가려니와 …다시 만날 소망, 그나라에대한 소망이 있기때문에 살아가는 힘이 생긴다는 겁니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그리고 우리 자신도 찾아오는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 죽음이후 썩어진 이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 아니고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믿는 자가 없는 것이지요.
2. 다시 살 때, 어떤 몸일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누구나 예외없이 다 죽음을 맞이하듯, 누구나 예외없이 동일하게 부활합니다. 행24:15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요5:28~29 무덤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모든 사람이 부활하는데, 부활의 몸, 누구의 형질인가? 입니다. 어떤 몸인가 고전15장은 온통 부활장입니다. 15:35절 이하에 보면,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것의 알맹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42 죽은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심은 씨가 죽어 새로운 것으로 거듭나지만 그 속성은 그대로입니다. 현재 우리의 속성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운 변화된 몸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굳게 세워야 합니다. 잘못된 사상들을 들어보십시오. 플라톤 헬라철학은 이원론인데 영혼불멸 영생을 이야기하면서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합니다 육, 몸은 다만 영혼을 담는 그릇, 감옥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악한 육, 깨어져버릴 육 몸 하면서 몸이 하는 일을 함부로 합니다. 육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 몸이 깨어지고 부서져 죽으면 영혼은새로운 날개를 펴고 올라간다고 해요. 이 사상에 심취하면 육신이 힘들고 고단할때 두려움과 우울증에 빠질 때, 나비처럼 훨훨 환상적으로 올라가야지 하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사상이 사람을 이처럼 비극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우리는 부활할 때 그 씨의 속성, 그 몸의 부활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몸, 다른 어떤 개체가 아닙니다. 그런데 윤회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때요? 영혼불멸처럼 영혼이 계속 살면서 돌고 돈다고 하잖아요. 한 생에서는 개로 태어나고 다음생에서는 미물로 태어나고 다음생에서는 다름 몸에 들어가고, 환생, 회귀 이런 것들이 다 이런 사상에서 나오는 겁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몸, 다른 속성으로 다시 태어나는것이 아니라. 내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완전한 죽음입니다. 다시 살아나셨을때, 다른 몸을 입으셨습니까? 무덤에 있던 몸이 없어졌잖아요? 그 몸입니다. 못자국 난 손, 창자국난 옆구리의 상흔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몸으로 새롭게 하신겁니다. 이처럼 우리 몸으로 거듭나는 것,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그럼, 나의 약점 그대로 부활합니까? 이 땅에서 약함으로 인하여 힘들었던 분들 … 그러면 나 부활해도 슬프겠네요? 아프겠네요? 아뇨, 우리의 약점을 새롭게 창조하실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속성은 그대로이지만, 우리 몸은 가장 아름다운 몸으로 영광의 몸으로 변하여 주십니다. 빌3:21절을 보십시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예수님의 변화된 몸이 어떨까요? 제자들에게 변화산상에서 한번 보여주셨잖아요? 마17: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처럼 영광스런 모습으로 우리도 부활한다는 겁니다. 화장한 분들은 어떻게요? 무에서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속성을 다 아시는 창조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장한 분들이나 화장한분들이나 차이가 없이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부활할 때, 부활의 몸이 우리의 속성을 그대도 가지고 다시 사는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이 몸을 함부로 할 수 가 없는 겁니다. 다시 산다는 이 고백이 우리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삶의 행동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겁니다. 이 신앙이 확실한 사람은 이 몸을 함부로 할 수 없고, 이 신앙이 없는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죽으면 끝이지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겁니다. 다시 사는 이 몸, 부활신앙으로 믿음을 굳게 한번 더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육체가 인생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몸을 "쳐서"그 몸이 자신을 파멸시키는 죄의 수단이 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바울이 실제로 자기 몸을 채찍질하거나 누더기를 걸치지는 않았지만 그는 육체적 욕망의 힘을 알았고 그래서 그 힘이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힘쓴것입니다(고전 9:24-27). 즉 바울은 자기 육체가 죄로 더럽혀지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또 그들의 몸이 "성령의 전"임을 아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고전 6:15-20). 이런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을 때, 이 나라가 하나님나라의 모형이 되는 겁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