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에 걸친 사도신경강해를 통해서, 사도신경을 심장을 내어주는 심정으로 고백하고 예수를 주로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는 사람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나님의 자녀라, 성도라고 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뭐라고 부르는가? 신33:29절 말씀에 모세가 죽기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쳤는데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런 엄청난 감탄을 시1편1절에도 나타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복되도다! 너는 행복자로다! 나는 행복자로다~ 여러분 이런 행복을 누리고 사십니까? 시1편을 통해서 행복한 존재인 것을 깨닫고, 행복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시편이 150편이어서 제일 긴 책인데요. 시편이 무엇인가? 어떤 신학자는 시편은 우리 영혼의 책이라고 했고요, 어떤 분은 찬송시라고 했으며, 어떤 분은 복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도 했습니다. 특히 칼빈은 우리 영혼의 해부학이라고 했는데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시편을 좋아했고, 시편을 통하여 치유받고 회복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찬송시 노래라는 것은 즐거워도 슬퍼도 힘들고 어려워도 승리의 순간에도 실패했을때도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시편 한 편 한 편이 성경의 압축서와 같아서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고 위로와 용기를 주고, 새 힘과 새 은혜를 주는 말씀인것입니다. 저자들을 보면 모세와 솔로몬 아삽 그리고 제일 많이 노래한 다윗입니다. 절망에 빠졌을때도,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을때도, 낙망하고 낙심한 일이 있을때도, 승리할때도 기쁨이 넘칠때도 찬송으로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그러니까 노래, 찬송이라는 것은 희로애락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 시편의 말씀을 통하여 같은 처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마음을 토로하여 시편 저자가 이겨낸것처럼 이겨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 시편1편의 복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행복자인가?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마라는 경고의 메세지를 잘 지킨 사람이 복있는 사람인가? 복있는 사람이 내가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가? 이런것은 의무적, 율법적 공로사상인가 아닙니다. 그래서 1절부터 시작하기보다, 3절을 통해서 먼저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신분, 우리의 위치를 살펴본 후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깨달아야…1절, 2절이 가슴에 와닿게 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왜 행복자 인지…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수동태입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는데요 렘17:8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물가에 심어진 나무…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누군가가 이 나무를 시냇가로 옮겨 심은 것입니다. 나무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옮겨줘야 가능하지요? 어디에 있다가 이렇게 좋은 곳으로 옮겨졌을까요? 요15:1절,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무를 시냇가, 물가로 옮겨 심으신 것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행위와 상관없이 농부이신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를 광야에서 뽑아서, 메마른 곳에서 뽑아서, 척박한 땅에서 뽑아서, 세상에서 뽑아서, 멸망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뽑아서 시냇가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면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옮기실 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출19: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독수리가 새끼를 낚아채서 업어서 옮기시는 모습…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옮겨심기운 곳이 어디입니까? 시냇가라고 하잖아요? 여기에 시내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냇가가 아닙니다. 관계수로와 같아서 물줄기를 인공적으로 끌고 들어온것이지요. 새만금이나 삽교천 방조제 같은 것으로 사시사철 농업용수가 가득하잖아요. 이런 수로는 메마르지 않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성전환상을 보십시오. 겔47장에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흘러나와 발목에 오르더니 허리에 오르고, 47:5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예수님은 요7장에서 생수의 강이라, 계22장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더라. 우리가 심겨진 곳이 어디인지 알겠지요? 우리가 무엇이관대 이렇게 큰 복을 주셨습니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시냇가, 생명수의 강가로 우리를 옮겨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만 제대로 안다면 우리 이렇게 감각없이 살 수 없습니다. 외치고 선포할 수 밖에 없지요. 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만 복을 받은 자입니다. 오!
3. 이렇게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사람이 살아야 할 삶의 원리, 기준이 있습니다. 크게 2가지가 있는데요. 1)내 생각으로 좋다고 하는 것에 그냥 끌려다니면 안됩니다. 1절 말씀인데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한마디로 악인이잖아요. 이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꾀는 여호와께 묻지 않는 모든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고 내 뜻대로 좋겠지하는 생각으로 하는 모든 행동들이잖아요. 실패하고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함정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꾀를 따른다고 하잖아요. 걷는 길의 개념입니다. 어떤 길을 따라가는가? 누구를 따라가는가? 외국에서 실제 있었던 사례라고 하는데요. 마라톤같은 경보대회에서 앞서가던 두 사람이 너무 힘들어서 기권하자고 하고 살짝 경로를 이탈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선수들이 다 그들을 따라왔다는 겁니다. 이처럼 처음 길을 잘못선택하면 이런 불상사를 만나게 되지요. 1절,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아버럽니다. 이런 모습이 악인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대표적인 모델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창13장에서 아브람이 롯에게 모든 선택권을 넘겨주잖아요.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이때 창13:10,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눈에 보기에 좋았더라. 그래서 덥석 소돔땅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13:12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근처까지 간거죠. 14:12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아예 소돔 안으로 들어가 집짓고 살고 있잖아요. 근처에서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안주한것입니다. 그러다가 19:1롯이 소돔 성문에 앉 있다가…고대시대 성문에 앉는것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 지역의 유지 지도자 재판관이라는 것입니다. 롯이 소돔의 유지가 되어 있는모습, 성공한 모습입니다. 시1:1절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따르다가, 서다가 앉아버리는 모습, 이모습이 바로 신앙의 실패자의 모습이며 악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의인, 복있는 사람은 이런 세상적 욕망을 과감하게 버립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주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2)적극적으로 주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율법이 우리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는 등불, 우리를 지켜주고 살려주는 원리로 다가오기 때문에 율법 생각할때마다 마음에 기울이 일고 샘솟듯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율법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마음에는 복음으로, 영혼을 돋구는 양약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주야로…날마다…묵상하는 겁니다. 묵상이 다른 것 아닙니다. 또 되새기고 되새기다 보면 맛이 새롭고 더 새롭게 되는 겁니다. 말씀을 이렇게 가까이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밀접하고 친밀하게 되는 겁니다. 이 모습이 우리가 주 안에 주님은 내 안에, 주님은 아버지 안에 우리는 아버지 품 안에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또 감탄하는 겁니다. 와, 나는 행복한 자로다! 이런 자에게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이며, 여호와께서 인정하십니다. 한 주 간 더 말씀과 가까이 하여 이 복을 누리시기를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친밀해지는 귀한 날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