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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1~6 언제까지입니까?구약 강해/시가서 2022. 5. 27. 17:26
시 13:1-6 언제까지입니까?라는 항변이 항변할 대상 하나님이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 교회의 흐름을 보면 시대마다 강력한 구호로 믿음을 표시했는데요, 일제시대 625시대는 핍박의 시대, 순교의 시대였지 않습니까? 안이숙사모의 죽으면 죽으리라의 책 제목처럼 죽으면 죽으리라의 믿음으로 신앙을 표시하고 그 믿음이 교회를 지켜 왔습니다. 7~80년대 교회의 부흥기에는 예수믿으면 복받습니다라는 만사형통의 표어로 교회부흥을 일으켰지요. 그러다 2000년대에 들어와 교회가 쇠퇴기에 들어가고 특히 몇년 동안 코로나시대를 거치면서 교회가 힘든가운데 있는데요 이런 쇠퇴기 침체기에 믿음을 일깨우는 강력한 표어가 없어요. 한마디로 교회의 구심점이 사라진거지요. 예수믿으면 복받는다는 기복신앙이 힘들고 어려워진 사람들에게 더 주님을 붙잡게 하기보다 신앙이 잘못되어서 내가 잘못믿어서 어려움을 당하는것인가보다하고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거 믿음과 신앙이 잘못되어서 그런것이 아니야!하고 믿음을 세워주는 말씀이 오늘 시13편의 말씀입니다. 오늘 다윗을 보십시오. 1절, 여호와여 어느때까지입니까? 오 주여 어느때까지 나를 잊으려하십니까? 하는 강한 탄식, 항변, 불평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 누가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믿음없는 모습을 보인다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습니까? 어린아이가 엄마를 향해서 투정부린다는 것은 투정부리고 어리광부리는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잖아요? 다윗이 믿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향하여 어느때까지냐고? 항변하고 있는겁니다. 그러므로, 불평하는 다윗의 모습에 실망하지 말고, 불평하는 것도 믿음의 대상이 있기에 그런것이지 하면서 이런 다윗이 어떻게 변하여가는지, 어떻게 신앙의 고봉에 오르는지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귀한 시간 될 수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는 캄캄한 때에 믿음을 포기하는 사망의 잠을 자면 안됩니다.
2절 말씀에 보면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원수는 힘, 세력, 권세를 입어 강한 힘으로 다윗을 압박합니다. 다윗은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이 가득합니다. 소망이 없어 포기하고 싶은 상황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3절, 사망의 잠을 자는 시기이지요. 사망의 잠을 자면 그동안 참아왔던 인내가 끝나는 때요, 원수들에게 항복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극한 상황의 때에 다윗은 계속 하나님을 찾습니다. 여호와여 어느때까지입니까?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무시를 당하며 조롱을 당하며 핍박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나를 잊으셨습니까? 왜 숨어계십니까? 왜 개입하시지 않습니까?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항변, 그리고 불만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믿음의 선진들을 바라보면 이런 캄캄한 인생을 통과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갈대아우르에 있을때에 부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런 약속이 이루어지던가요? 1년, 10년, 20년이 가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결국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안아보지만 오히려 분란만 가중되고 말았지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가 25년만에 이루어지지 않던가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어때요? 결혼후 20년만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품에 안았어요, 요셉은 꿈이 이루어지는데 수많은 고난과 고초를 겪은 후에 총리가 되고 생이별하였던 아버지와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지요. 이에 반하여 모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쓰임받는데 80년이 걸렸습니다. 이런 시기가 바로 사망의 잠을 자는 시기였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때를 잘 견뎌온것입니다. 설령 사망의 잠을 자고 싶을 때, 이제 모든 것 포기하고 싶은 때…이때, 믿음의 끈을 놓치면 안됩니다. 이때 주여! 어느때까지입니까? 어느때까지입니까? 언제까지 숨어계시렵니까? 하면서 주를 찾는것이 믿음없는 모습같지만 믿음을 붙잡는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인데 필립얀시의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한 사람들의 실화가 실려있는데 그중에 남미 페루에서 원주민 선교를 감당하는 젊은 선교사 가정이야기가 있습니다. 6개월된 아들이 어느날 갑자기 구토와 설사를 하면서 죽습니다. 그 아이를 묻고 그 무덤옆에 나무한그루를 심습니다. 하루중 가장 무더울 때 사람들은 그늘을 찾지만, 이 선교사는 강가서 가서 물을 퍼서 나무에 주고 그 나무와 아들의 무덤에 자신이 그늘이 되어줍니다. 그러다 결국 자신마저 쓰러지고 계속된 설사와 탈수로 죽어가게 됩니다. 이때 하는 탄식이 하나님은 도대체 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헌신한 대가가 겨우 이것입니까? 이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같이 던지는 질문이 있지요? 악인은 형통하고 하나님께 헌신한 이런 분들의 가정이 죽어가는 모습속에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오늘 시편처럼 왜 숨어계시는가? 그 선교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고통에 하나님이 함께 해주실 줄 알았다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증거이며,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께 살아있다는 증거였다고 고백을 합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는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도 없으니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거니와 하나님을 향해서 실망도 하지 않는다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요 믿음이 있다는 표시입니다. 이런 항변이 나올 때 믿음의 끈을 아주 놓치 말고, 더 하나님을 찾을 때,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는 여전히 같이 있었다고 하신것처럼 내가 어려울때도, 내가 시험 중에 있을때도, 내가 원망 불평하고 있을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사망의 잠을 자지 않고란 믿음의 끈을 끝까지 놓치 않는 사람인데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3절 말씀에 사망의 잠을 자려고 할 때, 4절 내가 염려하고 흔들릴 때에…원수들 대적자들 괴롭히는자들은 이겼다고 축배를 든다는 겁니다. 이때 끝까지 이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넘어지려할 때 버틴 힘, 사망의 잠이 엄습하려할 때 잠을 깨우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늘 하는 말 가운데 있는데요 기도와 믿음의 결단입니다. 1)이럴 때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 2가지의 기도인데요,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옵소서!=나를 깊이 살피소서, 생각한다는 의미는 주목한다 중시한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하시고, 주목하시고, 중시하신다면 그것으로 되는 겁니다. 창19:2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소돔에서 건지시고, 창30:22 라헬을 생각하셔서 요셉을 잉태케 하셨고, 삼상1:19절에서는 한나를 생각하셔서 사무엘을 잉태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면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해결해주십니다. 생각해주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기도제목은 3절 중반절인데요 주여 나의 눈을 밝히소서!= ‘눈을 밝힌다’는 것은 낙망하기 쉬운 고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며 또 자신이 처신할 바를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판단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현실 속에서 사람이 눈이 어두우면 가야 할 바른 길을 잃고 방황하며 믿음 없이 행하고 말과 행위에 실수하기 쉽기 때문에 우리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주여 눈을 밝혀주십시오 눈을 열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서 다윗의 눈이 뜨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고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보게 되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행7장의 스데반 집사를 보십시오.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한 일은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지 따질 만한 일이잖아요? 성령충만하고 지혜로운 스데반 집사가 좀 더 오래 사역했다면 교회에 얼마나 큰 유익이었겠습니까? 그런데 허무하게 돌에 맞아 죽는 이런 일을 볼 때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 본인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그리고 돌을 들어 치는 그들을 용서하고 오히려 축복하는 기도를 드리더라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행7:55절이하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영적인 눈이 뜨이고 열리고 보니까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해결되더라는 겁니다. 다윗이 나의눈을 밝히소서 간절히 기도하니까 원수 대적들의 핍박을 이길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2)믿음의 결단, 미래를 끌어내려서 현재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5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 절망의 상황속에서 나의 주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기뻐하고 찬양할 수 밖에 없노라! 이렇게 이미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5절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나는 주의 변함없는 사랑을 믿습니다. 환경이 이러할지라도 나는 오직 주님만 의지하겠습니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결단과 고백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경에도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사건을 알잖아요? 금신상앞에 절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넣겠다는 죽음의 경고에 이렇게 결단합니다. 다니엘3:17절 이하,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도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그리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렇게 믿음의 고백을 하니까 주님이 극적인 상황에서 건져주시지 않던가요? 다윗의 고백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오직 주님만 계시면 됩니다. 주님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 우리 생각대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믿음의 끈을 내려놓지 마시고, 오히려 더 주님을 바라며, 사모하며, 구하면 우리에게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미리 고백하시고, 미리 감사하시고, 미리 찬송하시면 눈이 열려 주를 보는 은혜를 주십니다. 오직 주님의 믿음으로 힘든시대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구약 강해 > 시가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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