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5:1-5 주의 장막에 사는 자, 진정한 삶의 예배자 대통령이 바뀌면서 근무지를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기면서 청와대를 개방했는데요. 개방한 첫 날 입장하는 모습을 혹시 보셨습니까? 제일 먼저 입장하는 무리들이 한 손에 복숭아 가지를 들고 입장하는 모습을 보고, 이곳이 북한인가?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무속신앙에서 복숭아 가지는 잡귀를 쫓는 부적과 같은 물건이라는 겁니다. 청와대를 개방하면서 청와대가 귀신들이 많다는 것을 공개하는 것인지 참 안타까운 일지이요. 이전에 청와대는 대통령의 관저가 있고 사무실이 있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계신곳이라 경비가 삼엄하고 허가를 받아서 들어가더라도 허락한 곳만 다녀야 하는등 통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이런곳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있지요? 대통령 자신 그리고 대통령 가족 자녀들은 마음대로 다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자기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청와대처럼 특별한 집을 오늘 소개합니다. 1절 말씀에, 주의 장막, 주의 성산…청와대처럼, 이 장막 성산에 들어 갈 사람이 누구인가? 주의 장막과 주의 성산은 말씀 그대로 주님의 집이요, 주님의 산이잖아요? 당연히 주인이신 주님이 계시고, 주의 자녀들이 있겠지요? 이 주님이 계신 장막, 성산에 문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기도 하고, 하늘 성전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곳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장막과 성산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가?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가?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나라에 입성할 자격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크리스찬의 삶의 원리에 대하여 깨닫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나는 누구인가? 우리의 정체성인데요, 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 하나님의 자녀이다! 주의 장막, 주의 성산은 시온산 예루살렘 성전이며, 오늘날로 보면 하나님나라입니다. 1절말씀에, 주의 장막에 머무를자~ 주의 성산에 사는 자…머무르는 자=잠시 잠깐 들어가 구경만 하고 오겠다는 것이 아니라, 체류하다, 거주하다, 정착하다는 뜻으로 들어가 살겠다는 겁니다. 성전의 문지기에게 “저 여기 들어갈 수 있나요” 여러분, 이 질문을 현대교회에 적용하면 “저 교회에 들어가도 되요?””저도 예배 드릴 수 있어요?” 오늘날 교회에 들어오는데 특별한 제약이 없잖아요? 누구든지 오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담배와 술등 세상 오락 다 끊고 오라고 하면 교회에 들어올 사람이 있겠어요? 이미 교회에 들어오신 분들은 교회 문턱을 들어오면서 “저 지난 주 맘대로 살았는데 오늘 교회 들어가도 되요?” 하면서 들어오시는 분 계세요? 특별한 의식 없이 그냥 마음대로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 교회아닙니까? 오늘 1절 말씀을 되새겨 보면 참 무거운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주이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누가 주의 장막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자격을 논하고 있습니다. 신23장에 보면 여호와의 총회, 여호와가 계신 곳,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환이 상한자, 음경이 잘린 자, 사생자, 암몬 사람과 모압사람등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자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진영, 거룩한 곳에 부정한 것이 없도록, 부정한 것을 가져오지 못하는 규정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듯이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여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그 다음 아이성을 공격하는데 크게 실패합니다. 실패한 이유가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 진영 안에 탐욕을 품은 자, 한마디로 더러운자 아간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심판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부정한 사람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면 안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하나로 인하여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성전에 들어오면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면서 다시 한번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주의 장막에 들어갈 수 있는가?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자신을 보니 어때요? 부정으로 얼룩진 모습이지요. 흠과 점이 많아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지요. 힘없이 고개숙인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말씀, 복음이 있습니다. 그렇지! 마9:2절 이하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말씀에서 주님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머리털보다도 더 많은 우리의 죄를 어떻게 하셨다고 해요? 사함을 받았느니라. 탕감을 받았느니라. 요1서 1:9절 말씀에서는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양털보다도 더 희고 깨끗하게 씻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율법의 거울로 바라보니 점이요 흠이요 죄악투성이여서 성전문앞에서 고개숙이고 쓸쓸이 뒤돌아 설 수 밖에 없는 자격미달, 함량미달인데…복음의 거울앞에 서니 의롭고, 깨끗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명찰이 걸려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문지기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저 왔습니다. 하면서 당당하게 들어가는 겁니다. 1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주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전앞에서, 교회앞에서, 묵상할때마다 나는 주의 장막, 주의 성산에 거하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자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 곧 하나님나라를 본 자, 하나님나라, 주의 장막, 주의 성산이 있음을 아는 자, 믿는 자는 이 땅의 것으로 인하여 낙심, 낙망, 좌절, 슬퍼하지 않습니다. 이것보다 더 영원하고 아름답고 귀한 하나님나라를 품고 있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이런 사람은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라이프 삶을 살아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인데요. 적극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있고 소극적으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1)적극적으로 반드시 해야할것, 2절 정직하게 행하라~! 여기서 정직의 의미는 완전하고 흠없는 모습을 말합니다. 완전하고 흠없다는 것은 제물에 관한 동물을 가리킬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희생제물처럼 흠이 없어야 그 제사를 주님이 받으신다 우리의 삶이 제물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롬12: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정직한 삶이 흠없는 제물의 모습이며, 이 모습이 영적예배라는 겁니다. 2절 이어서 공의를 실천하며…공의, 참 어려운 말이지만 공정, 의로움인데 기준, 측정, 표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보는 윤리적 도덕적 기준이 있잖아요? 종교적 기준이 있잖아요?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의 기준은 우리에게 말씀입니다. 말씀의 선을 벗어나지 말자, 그 다음 2절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신실, 진리인데요. 우리 마음속엔 진리가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입에서 진리가 나오지요. 진리는 다른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주님으로 가득차 있어야한다, 주의 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 입에서는 진실, 진리, 복음, 예수님만 나올 수 밖에 없다! 소극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도 있습니다. 3절 말씀,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아니하며,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5절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말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말라….여기에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웃과 관련된 계명입니다. 험담, 비방, 조소, 멸시하지 말고 이웃을 이용하지 말고, 이웃으로 오히려 사랑하라는 겁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으면, 마음에 샬롬, 평화를 잃어버리고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더군다나 이웃이 누구입니까? 신앙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설령 믿지 않는 자일지라도 잠재적 언젠가는 하나님나라의 가족이 될 미래의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의 관계가 뒤틀려지면 안되는거죠. 더군다나 이웃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끄러울수가 없어요. 요1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더군다나 롬14:15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적극적으로 박해하는 자를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라는 겁니다. 세상은 가인의 논리, 라멕의 논리, 니므롯의 논리로 짓밟고 죽이는 사단의 논리이지만, 천국 하나님나라의 논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멘
3. 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의 삶의 원리는 섬김입니다. 4절 말씀인데요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재하라고 합니다. 망령된 자와 두려워하는 자, 멸시와 존대를 대비하면서 삶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멸시해야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망령된 자, 누구일까요? 하나님에 의해 거절 거부당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당한 자…이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며, 이들의 영향을 받지 말라는 겁니다. 반대로 우리가 선대하고 섬겨할 존재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두려워한다는 것은 경외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존대, 존경, 섬기는 것입니다. 갈4:5절에 보면 너희가 할 수 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갈라디아교인들은 복음을 전해준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어주고 싶을 정도로 섬겼다는 겁니다. 갈6:6절에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으로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신앙 공동체의 삶의 원리, 바로 섬김이라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공동체에 가운데에 산해진미 맛있는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답니다. 그런데 똑같이 긴 수저와 젓가락을 쥐고 있답니다. 지옥의 모습을 보니 긴 젓가락으로 자기가 원하는 음식을 집었는데 너무 길어서 먹지 못하고 안타까워하고 있고, 천국의 모습을 보니 긴 젓가락으로 집어서 서로 먹여주면서 맛있게 먹고 있더라는 겁니다. 믿음의 공동체 서로 섬김으로 아름다운 공동체가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부정과 불법 탈법으로 경찰에 쫓기는죄인은 어디를 가도 잡힐까봐 불안합니다. 반대로 주의 장막, 주의성산에 거하는 자, 늘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 그곳이 하늘나라인겁니다. 찬438장처럼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는겁니다. 이 믿음으로 날마다 주님이 주신 평강가운데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