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입시철인데요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이 정원미달이라고 합니다. 제가 신학교 신대원입학할 당시 3:1이어서 지원했다가 떨어진 분들이 나는 사명자가 아닌가? 하면서 다시 1년 더 기도하고 준비해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주의 종이 되겠다고 자원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오늘날은 왜 이렇게 줄어들었을까요? 교회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이처럼 줄어들고 목회자에 대한 호감도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목회자를 세속적인 직업으로 바라보면서 선호도에서 멀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 같은 경우를 보면 건강보험공단의 전신인 의료보험조합에 계속 다녔다면 안정된 직장과 상당한 연봉을 받아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것입니다 주의 일 한다고 퇴직할 당시가 1993년도인데 이때부터 현재까지 세상적으로 늘 부족하게 살아왔고 지금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주의 길, 이 사명의 길을 눈물없이 못가는 길,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지요. 오늘 우리 주님이 하나님나라, 하나님왕국의 복음을 전할 동역자를 부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제자그룹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들이 주님의 부름 앞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주님은 누구를 부르시는지를 살펴보면서 주님을 따르는 자가 품어야할 비전이 무엇인지 깨닫는 귀한 시간 될 수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사람을 낚은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실 때, 17절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기에서 사람을 낚는다?는 이미지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렘16:16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많은 어부와 많은 포수가 등장합니다. 이들의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에 죄악으로 가득찬 우상숭배자들을 심판하시겠다는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도구로 부름받은 자가 바로 어부이며 포수입니다. 어부가 낚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난 죄악된 백성들이지요. 예수님께서 구약에 심판의 이미지인 어부를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기쁨의 파수꾼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심판사역을 하는 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 14절, 하나님의 복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 믿는 자는 심판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의 사명자로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십니다. 이에 시몬과 안드레가 어떻게 반응했다고요? 20절에 야고보와 요한이 어떻게 반응했다고요? 곧, 즉시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더라! 이들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 사람들의 지탄과 멸시를 받는 길로 알았다면 이렇게 곧 즉시 순종했을까요? 복음서를 보면서 제자들의 모습을 보니까 예수를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제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즉각적으로 반응 순종했을까요? 세속적인 가치관, 예수를 따르면 성공, 잘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을 것입니다. 막10: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고난과 죽음을 미리 말씀하시는데 이때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구합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말을 들은 열 제자들의 반응...막10: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보세요 제자들 모두, 특히 처음 부름 받은 야고보 요한이 주의 나라에서 우편 좌편의 자리를 기대하고 욕심내고 있잖아요. 주님은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세상가치관과 세상나라에서의 성공을 기대하고 있더라. 그렇다면 이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사명이 무엇인지 주의 제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명을 제대로 인식한 때는 행2장에 오순절 성령을 받은 이후입니다. 성령님을 받고 난 이후, 곧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이후 이들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집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처럼 너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지라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이 예수를 믿으면 살리라 하면서 고난과 핍박 그리고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고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면 구원의 은총이 임할 것이요, 거부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입니다. 설 명절입니다. 가족친지친구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17절, 나를 따라오라를 알면 주님의 부름에 아멘할 수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이 요청은 나의 뒤를 따라오라, 나를 뒤따라 오세요! 내 뒤에 서세요!입니다. 이 부름과 초청은 예수님이 앞장서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내가 앞서서 예수님을 끌고 가려는 것은 내 중심이며 내 욕심입니다. 왜 우리의 삶이 힘들까요? 그것은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내 생각으로 끌고가려고 하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뒤에 서라 내 뒤에서 따라오너라. 내가 앞서서 먼저 길을 낼 것이다. 내가 앞서서 먼저 싸우리라! 바로 이어서 나오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1:25이하에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 있는 귀신과의 싸움이잖아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고 계십니다. 먼저 우리 주님이 싸움의 모든 방패가 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말씀을 처음 받았을 때, 어떤 마인드였을까요? 우리 주님이 로마와 싸우시려고 군사를 모집하시는구나! 하면서 즉시 따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고국을 이렇게 사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품고 있는 메시야 대망사상 그것은 다윗과 같은 메시야가 오셔서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속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주실 것이다! 이런 마음, 열정을 품고 있는데 나를 따르라고 초청하니 어때요? 가정, 아버지, 생업을 버리고 초청에 아멘하더라. 사명의 길을 제대로 알고 사명을 놓고 기도하고 신학생이 되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다. 그때 그때 부딪쳐가면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면서 알아가는거죠. 따르는 자의 기본 자세는 본 받는 것입니다. 주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유치원에서 글자공부할 때 점으로 가나다...그 선으로 이어가면서 글을 배우는것처럼 말입니다. 제자들이 성령님에 이끌려 사명을 감당하니까 이들에게 별명이 붙었는데 행11장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주님을 온전히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 내 뒤에 서라는 부름에 우리는 보통 준비가 안되었어요 조금 더 배우고요, 조금 더 세상 맛을 즐기고요, 하필이면 왜 접니까 다른 사람요! 이 핑게 저 핑게로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초청은 하나님왕국으로의 초청이며 하나님의 동역자로의 초청이며 하나님의 대사로의 초청입니다. 세상나라 세상제국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고 몸부림치는것을 보면서 느껴지는것이 없습니까? 우리가 너무나 세속화 명예화 물질화 되어 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첫 제자들을 부르는데 이들의 반응이 어때요? 어떤 가치관을 가졌든지 상관없이 아멘하면서 따르는 이것을 마가는 지금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 준비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시니까 아멘하는 겁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뒤에 서는 것...그것은 할 수 있잖아요?
3. 16절 지나가시다의 뜻을 알면 감사가 터져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서에 지나가시다라는 표현이 몇 군데 있습니다. 오늘 1:16절에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 마태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세리 레위를 부르실때도 지나가시다가...눅17: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누구를 만났는가하면 10명의 나병환자를 만납니다. 눅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여기에서 누구를 만났을까요?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지나가시다가 만난 사람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세리 마태, 10명의 나병환자, 삭개오...예수님께서 우연히 지나가다 이들을 만나서 제자로 부르시고 치유시켜 주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까? 이들을 목표로 이들을 향하여 나아가신 것 아닙니까? 잃어버린 어린양을 위해 산가시에 찔려가면서 찾아 헤매는 목자의 심정처럼 이들을 목적을 가지고 찾으신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나가다’의 헬라어 ‘페리파테오’는 우연히 지나간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히브리어 ‘할라크’에 해당되는 말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창 5:22, 24, 6:9)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라는것입니다. 단순히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믿음으로 걷는 동행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찾아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들이 누구입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갈릴리의 어부들입니다. 마태와 삭개오 세리입니다. 10명의 나병환자들입니다. 약한 자들이지요. 사회적 약자들이지요. 이들을 통하여 영적전쟁에 나아가려고주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때요? 역시 약한 자들을 먼저 부르십니다. 그리고 강한 자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주님의 군사가 되기에 합당한 사람,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한 사람...준비된 자입니다. 무엇이 준비되어야 할까요? 초기의 제자들 마음에 품은 나라회복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나라 하나님왕국 복음에 대한 열정을 품는다면 주님은제자들에게 허락한 영적권세를 동일하게 주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곧 그물을 버려두고, 곧 아버지와 품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는 것처럼 세상에 얽매인 것들을 뒤로하고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반응하고,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에 반응한 것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순종한 것처럼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용사들,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