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이스라엘백성들이 품고 있는 안식일에 대한 생각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출20장의 십계명 안에 있는 안식일인데요, 이 날에 대하여 출20:11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창조의 큰 일을 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신것처럼 너희들도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또하나의 개념은 신5장인데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으니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켜라고 하십니다. 두 개념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구약의 안식일은 창조하신 하나님, 종으로부터 구하여 내신 구속하신, 살려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제는 너희는 종이 아니라 자유자이니라. 그런데, 우리가 이런 참된 자유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시대 보십시오. 회당에 귀신들린 사람이 들어와 있었잖아요? 겉으로는 자유자인 것같지만, 귀신의 통제를 받고, 평안한것 같지만,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지 않습니까? 시몬의 장모는 열병으로 누워있습니다. 여기에 안식이 있어요? 오늘 우리 주님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 악한영에 시달리는 자들을 치유하시면서 안식일 참된 안식을 주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열병에 들린 시몬이 장모의 치유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0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누워있다는 동사는 미완료과거형으로 오래전부터 누워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열병에 걸렸다, 질병에 걸렸다는 것은 레26:14절,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레26:16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유대인이 보는 열병의 관점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사회적 격리처럼 손가락질을 하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코로나 3년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38도가 넘는 열병을 경험하고, 초기에 코로나 걸렸을 때 얼마나 따가운 눈총을 받았습니까? 더군다나 가정에 이렇게 누워계신 분이 있는 가정들 심정이 어때요? 요즘은 요양병원 요양원, 요양보호사등 사회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지만, 그래도 가정에 오랫동안 아픈 사람이 있으면 가족식구들 모두가 힘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으니 가장같은 베드로가 가정을 비워야되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의 가정을 주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안식일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시고 곧 바로 시몬이 집으로 가십니다. 안식일이어서 땀이 나게 뛰어가고 싶으셨겠지만 그럴수는 없고 바삐 가신것같아요. 그리고 곧 바로 열병에 눌린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즉시 떠났습니다. 주님의 행동을 보십시오. 이 날은 안식일입니다. 더군다나 사회적 격리의 대상인 열병입니다. 그리고 여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회적 제약, 걸림을 뛰어넘어 고통당하는 영혼을 생각하고, 치유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도 고통당하는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 주의 사랑을 품고 예수이름으로 선포하면 주님이 이렇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2. 주님이 찾아가신 사람이 있고,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열병에 걸려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는 주님이 찾아가신 것으로 나옵니다. 이런 반면에, 막1:32절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다른 사람에 의해서, 또는 자발적으로 주님을 찾아온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시며,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신 이 놀라운 일이 갈릴리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왔는데, 언제 데려왔는지 보십시오. 32절 저물어 해 질 때에...여러분, 오려면 낮에 와야 정상 아닙니까? 저물어 해 질 때는 집에 가야지요. 그런데 왜 이 때 사람들이 몰려왔을까요? 예수님께서 회당과 시몬의 장모의 집에 간 날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 저물어 해 질 때 사람들이 몰려온 것은, 안식일 규례를 지킨다고 시간을 기다린겁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니까...안식일 끝나는 시간대를 기다렸다가 요이 땡 하면서 달려온겁니다. 우리 주님은 안식일 참된 안식과 자유와 평안을 누려야한다는 생각을 가지신 분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안식일 선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신분이십니다. 유대인 서기관과 율법학자들처럼 사람의 전통, 사람의 계명에 메여있는 분이 아니시지요. 사람들은 당시대 서기관의 가르침, 안식일 계명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무거운 짐에 메여 눈앞에 치유의 주님이 계셔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보이지 않는 이런 것들에 메여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볼것이냐, 사람의 눈치를 볼 것이냐, 사람이 두려운가? 하나님이 두려운가? 사람의 전통에 눌려있었던 이들을, 각종 질병에 눌려 참된 평화를 잃어버린 이들을 우리 주님은 치유해주셨습니다. 33절 이하를 보십시오.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 우리 주님은 어떤 모습, 어떤 마음이 되었든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계십니까? 어떤 질병이 있으십니까? 주님 앞에 가져오십시오. 더 바라기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믿음으로 가져오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3. 치유받은 은혜받은 사람들과 제자들의 반응을 통해서 어떤 마음을 품어야할까? 31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시중을 드니라=식사시중을 들었다는 뜻인데, 치유되자마자 즉각적인 반응은 식사시중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미완료용법으로 계속적인 섬김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날은 안식일이잖아요 요리하면서 섬길 수는 없었을것입니다. 준비된 요리로 대접하지 않았을까? 진수성찬처럼 무엇을 크게 대접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으로 섬겼음을 보여줍니다. 치유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크게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장모의 섬김을 바라보니까 있는 것으로, 마음을 다하여 섬기는 것, 주님은 이 섬김을 귀하게 보시고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살펴볼 것은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곧 즉시 아멘 하면서 따랐습니다. 특히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을 보십시오. 1:20절,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야고보와 요한의 집은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배와 품꾼까지 있는 집이잖아요. 그럼에도 주님의 부름에 아멘했습니다. 따르자 마자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시지요. 베드로장모의 중한 병을 단번에, 즉각적으로 치유하시지요. 오는 사람마다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들의 결정을 얼마나 흐뭇해했겠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결정들이 있었는데 주님을 따르는 결정이 최고였어! 시몬 베드로는 어때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아멘으로 반응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가정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개의치않고 주님을 따른 결과, 장모님을 치유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이젠 마음놓고 주님을 따를 수 있겠다고 근심이 없어졌다고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그리고 33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자기 집에 사람이 이렇게 온 적이 있었던가! 결혼할 때도 이렇지 않았을텐데...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들고, 치유받고 좋아하는 모습, 그리고 시몬에게 자네 선생님 말이야 최고야 하면서 시몬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다음에 누구 데려오면 그때 앞자리좀 잡아주고, 신신당부하는 부탁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뿌듯했겠어요? 그런데 새벽에 주님을 찾았는데 안보이는겁니다. 어???어디가셨지? 갑자기 당황스럽게 된겁니다. 그래서 36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여기에서 따라가와 37절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의 찾다=과학수사대원이 무슨 증거를 찾기 위해 뒤지는듯한 모습입니다. 좋은 의미로 걱정이 되어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어떤 큰 이득을 줄 대상이 없어져서, 큰 손해가 올 것 같아서 정신없이 찾아헤매는 모습입니다. 왜 이렇게 주님을 찾았을까요? 사람들은 병고침받고 싶어서,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야할 환호, 명예, 칭찬을 위해서 찾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주님이 해결해주셔야 자기들의 주가가 오르니 주님을 찾는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왜 찾으십니까? 많은 사람들 무리처럼 무엇을 받기 위해서, 이득을 얻기 위해서, 또는 제자들처럼 명예와 칭찬을 받기 위해서 주님을 찾으십니까? 주님이 이런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씁쓸해하시겠습니까? 주님 보십시오. 수많을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일일이 다 치유해주시고, 하루종일 너무도 힘드신 그 시간에, 35절, 새벽 아직도 발기 전에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우리 주님은 새벽 미명에 기도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례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여 성령님과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기도하셨다. 왜 기도하셨을까? 능력을 재충전할 이유가 있을까요? 기름부음을 더 받아야했나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셨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띄웠을까요? 회당에서 가르치고 귀신을 내쫓았을때에 권위있는 새교훈이라고 하면서 놀라워했잖아요. 갈릴리 사방에 소문이 퍼졌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높일 때, 더 겸손하고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 그 비결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내게 다가오는 칭송, 명예, 자랑을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돌릴 수 있는 비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기도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내려놓는 것이요, 우리가 주의 이름을 선포할 때 주님의 행하심에 대한 기대가 기도입니다. 베드로처럼 높아지려는 마음을 내려놓은 것이 기도요, 병고침만 받으려는 욕망을 버리고 시몬의 장모처럼 더 섬기려는 마음을 달라고 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 주님 더 힘들수록 더 기도하여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는것처럼 우리도 기도로 사명을 더 붙잡는 주의 일꾼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