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 보면 잘못을 할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다만 사람에 따라서 잘못과 실수에 대처하는 자세가 다르고 그것을 보고 그 사람 됨됨이를 짐작하기도 합니다. 정치인, 권력자들이 잘못을 시인하는 경우가 거의 없잖아요? 잘못했다고 하는 순간 정치 생명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시인하는 것이 사실은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당시대 종교지도자들 율법전문가들과 계속 논쟁 다툼하는 모습이 비쳐집니다. 어찌보면 일부러 문제를 일으켜서 그 문제를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돌아오게 하는 극처방일수도 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돌이킬 것이고, 어떤 사람은 더 완악하고 강퍅한모습을 드러내서 자기의 치부를 드러낸 사람을 공격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계속이어지는데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가야할 것인지를 깨닫는 귀한 시간 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함정을 파고 모함하는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시대 율법전문가인 서기관과 경건하다고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님의 행동은 자기들을 향한 공격 또는 반항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특히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는가 하며,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매국노같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하는 모습을, 더군다나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며 하나님만이 안식일의 주인이신데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하니 예수님을 향한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을 보고 어찌할 바 모르고 있는데 오늘 안식일 회당에서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1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안식일 회당에 있습니다. 2절,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주시, 감시, 꼬투리를 잡으려고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동행구절인 눅6:7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치유사건에서 환자인 손마른 사람에게는 특별한 관심이 없으시고 예수님을 감시하는 이들에게 집중하시고 말씀하십니다. 4절, 그들에게 이르시되...일반적으로 환자의 믿음을 본다든지, 또는 환자의 상태가 어떠한지, 병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이런 상황설명들이 없어요. 이런 전후 상황을 볼 때, 예수님을 공격하려는 자들이 이 사건, 이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함정을 파놓고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악한 흉계를 꾸며놓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꼼짝없이 이들의 계획에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예수님의 말씀들을 보면 이 모함과 흉계를 간파하시고 이들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4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아무리 율법적으로 문자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다 아는 답입니다. 정답은 선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선택이라는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5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시고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셨다! 이들의 마음이 완악하다, 굳어있다. 메말라 있다, 어리석다. 창세기1장 처럼 혼톤하고 공허하며 무지한 상태임을 보십니다. 성경에 대표적인 완악한 자 하면, 출애굽할 때 애굽왕 바로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권능과 능력이 선포되는데도 불구하고 한 줌 먼지같은 존재, 지푸라기같은 존재인 자신을 모르고 계속 항변했다가 결국 애굽이 쇠하게 된 겁니다. 성경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잖아요? 악인과 의인, 완악한 자와 부드러운 자, 메말라 말라버린 완악한 곳에 씨를 뿌리면 싹이 나오겠어요? 부드러운 밭에 씨를 뿌리면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는데 말입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의 흉계를 다 아시고도 우리 주님은 불쌍한 영혼, 손이 말라 비틀어져 손을 들수도 없는 이 사람, 더군다나 이들에게 이용당하는 이 사람을 우리 주님은 위험을 감수하고 치유를 해주십니다. 선을 행하십니다. 비참한 영혼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상대방, 원수의 공격이 있음을 알면서도 이것이 선이요, 이것이 진리라면 행동하십니다. 마6: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고, 이 말씀 그대로 행하셨고, 사도바울은 롬12:14절 이하에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 역시 삶 가운데에서 이처럼 선택의 순간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을 행동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처럼 이런 믿음의 행동, 살리는 행동에 적극적이시기를 바랍니다.
2. 악인은 악인끼리 연합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 계속 예의주시하는 감시하는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유대사회에서 종교적으로 경건하다고 높임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들과 달리 당시대 헤롯당이 있었는데 헤롯당은 정치적인 집단입니다. 출세하기 위해 헤롯에 둘러붙어있는 자들 당연히 친로마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세속적인자들이지요. 그래서 이들을 친일파처럼 반역자로 여겨서 이들을 처단하려고 하는 그룹이 있는데 열심당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6절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으로 열심인 이들이, 세속적 정치적으로 출세하고 있는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 모의하더라. 이들은 물과 기름으로 가까이하기엔 너무먼 당신들이지만,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당하는데로 서로 짝짜꿍이 되어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막12: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이들이 합심하여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해달라고 소란을 일으키게 하고 결국 자신들의 정적이라고 생각한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서더라. 마가복음2,3장 예수님의 초기사역인데 이들과 계속 논쟁, 대치, 갈등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 그리스도인, 십자가에는 악인들이 연합하여 공격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이들의 공격이 없이 잠잠하고 평안하다면 혹시 악인들 세상이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역시 세상과 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점검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3. 손마른자의 치유를 통해서 나는 무엇이 메말라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1절에 한쪽 손마른 사람=손이 말랐다, 오그라들었다. 근육이 마비된 근위축증환자입니다. 다른사람이 볼 때 이 사람의 병은 당장 죽을 것 같은 위급한 병이 아닙니다. 그래서 안식일 지난 내일 고쳐도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 마땅하지 않느냐? 손 마른자를 향하여 한 가운데 일어서라. 그리고 5절 네 손을 내밀라!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이 치유에서 주님의 관점과 환자의 관점을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이용하려고만 하고, 감시의 목적으로 사용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 영혼의 고통, 이 아픔, 내일까지 기다리실 수가 없으세요. 지금 당장 이 메인 짐, 고통 덜어주고 싶은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누가 고통을 당하고, 누가 어려움을 당하고, 누가 아픔을 당하면 지금 당장 그 문제에서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라고 조금 기다려요 할 수있는지 몰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이런 마음입니다. 내가 좀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이 영혼 자유케 하는 일이라면 내 기꺼이 하겠다. 내가 죽어서라도 이 영혼이 산다면 그렇게 하겠다. 바로 우리 주님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이 마음 때문에 우리가 죄로 자유함을 얻었고, 주님께서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우리가 새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마음으로 아파하는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손마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보십시오. 종교인들에게 이용당하는 가련한 분입니다. 더군다나 손이 말라 아무일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손을 내밀라 하십니다. 그런데요 손을 내밀라 하시기 전에, 강력한 메세지를 먼저 주셨어요. 5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며...탄식했다는 단어=쉴리페오, 한글개역에서는 근심하셨다. 원의미는 함께 슬퍼하다, 함께 고난받다...탄식했다는 이 말을 듣자 마자, 아! 우리 주님이 나의 고난 고통에 동참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이 뜻에 아멘하면 손이 마른 사람이 손을 내밀기가, 손을 들기가 힘들어요, 엄청난 고통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손을 들려고 내밀려고 힘을 쓰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똑같은 메시지를 받아도 완악한자는 여전히 강퍅하게 도리어 마음의 문을 더 닫습니다. 그럼애도 우리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노하십니다. 이것은 버린다는 의미보다, 불쌍히 여기사 한번 더 기회를 주시는 모습, 돌이키라는 모습으로 노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도 화를 내셨어! 독사의 자식들아 그랬다고 우리도 욕해도 되겠네!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여전히 돌아와야 할 하나님의 자녀로 보고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하듯이 노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잘못을 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제사장 처럼 그러지 마라 말로 끝내고 말것입니까? 이것이 사랑입니까? 돌아오게끔, 잘못을 뉘우치게끔 매를 들어야지요. 돌이킬 기회를 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더 완악하게 반응하고 나가서 헤롯당과 결탁하더라.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마음을 연 손마른 환자, 그는 손을 내밀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치유함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기쁨은 이렇게, 자유는 이렇게, 회복은 이렇게 받는 겁니다. 메말라 비틀어져 소망이 없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에 아멘하면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되어 생명의 물 생수를 끌어올리는 겁니다. 겨울에 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뭇가지들이 물을 끌어들이니까 생명의 움을 틔우지 않습니까? 사40:6절에 보면 백성들을 풀로 비유를 해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나뭇가지처럼 메말랐다! 왜 말랐을까? 물인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주님을 붙잡으면 영생의 말씀이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