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강해/시가서

시30:1~12 슬픔이 변하여

엘리사처럼 2022. 10. 14. 22:41


시30:1~12 슬픔이 변하여

우리 인생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 국경지방에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오랑케땅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이웃주민들이 위로의 말을 전하니 그 노인은 “이 일이 복이 될 지 누가 압니까?” 그리고 몇 달 뒤 그 말이 암말 한필과 함께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웃주민들이 축하의 말을 전하니까 노인이 “이 일이 화가 될 지 누가 압니까? 며칠후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답니다. 위로의 말…”이 일이 복이 될 지 누가 압니까?” 몇달 뒤 오랑케가 침략, 모든 젊은이들을 징집령으로 다 끌고 가는데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진 탓에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눈앞에 벌어지는 결과만을 가지고 연연해 하지 말라는 뜻으로 새옹지마라는 말이 탄생했다고 하지요. 하루하루 우리의 인생,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하루에 사건사고가 수십만 건이 넘어요. 더군다나 힌남노라는 거대한 태풍이 올라오고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며 나아갈 수 밖에 없는것이지요. 오늘30편 6절을 보십시오. 형통할 때가 있고, 9절 무덤에 내려가는 것같은 때가 있고, 11절, 춤추고 기뻐하는 때가 있습니다. 전3장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한 것 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라는 것은 기도하는 것은 항상 기뻐하고 춤추는 형통의 때이지만 우리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예측불허한 돌발상황이 늘 있습니다. 이러한 때 인생의 메뉴얼이 있으면 쉽게 대처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의 매뉴얼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당황하며 허둥지둥되겠습니까? 30편 말씀을 통해서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서 성경의 매뉴얼로 잘 대처하여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형통할 때가 있습니다.
전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뒤돌아보아라 이 두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신다! 그럼 다윗은 형통할 때 무엇을 했을까? 6절, 형통할 때에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나는 영원히 요동하지 아니하리라! 대단한 신앙, 강력한 믿음의 선포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해석한 주석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 의미가 자신의 신앙을 호언장담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타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보다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고 간증하고 호언장담하는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거짓된 안점감 속에 도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통할 때, 건강할 때, 성공했을때, 다윗처럼 호기를 부리면 안됩니다. 나에게 절대 시련, 아픔, 질병, 실패는 없어!라고 장담했던 베드로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예수님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호기롭게 장담했지만 닭이 울기전에 네게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처럼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던가요? 그러므로 나도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 주님이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주님이 나를 형통하게 해 주셨다는 주권사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형통할 때, 다른 것 아닙니다. 주님이 이루어주셨습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고, 이것도 영원이 아닌 순간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럼로 눈에 보이는 형통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이신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2. 곤고할 때, 깊은 수렁에, 무덤에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1절 끌어내사, 3절 끌어내사라는 말씀이 있지요? 9절 무덤에 내려갈 때에, 인생의 밤을 만난것입니다. 11절 슬픔이라는 것이 갑자기 찾아온 것입니다. 이 캄캄한 밤은 누구에게나 다 찾아오는 것입니다. 해와 달이 하루하루 낮과 밤을 바뀌어 비추는 것처럼 말입니다. 밤이 없이 몇날 며칠을 해만 비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해와 달이 바뀌어야하고, 바람도 필요한것이며, 밤도 필요한것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밤은 깊은 수렁일 수도 있으며, 2절 말씀처럼 고침을 받아야하는 질병일수도 있으며, 전쟁에서의 패배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인생의 밤, 깊은 수렁에 빠지면 대부분 하나님을 향하여 독소를 쏟아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일을 만나면 대부분은 4가지 현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왜 하필이면 저입니까? 내가 무슨 죄가 있길래 하는 원망파/ 다 끝났다는 뜻으로 더 막가는 막가파/ 내 모든 것을 드릴테니 연장해달라는 또는 앞으노 남은 생애를 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타협파/ 제가 죽으면 하나님 손해입니다 라는 협박파가 있다고 해요. 이런 일을 만났을 때, 다윗은 어떻게 헤쳐나왔을까요? 2절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부르짖는 기도가 가장 첫번째 인것같습니다. 전능자, 치유자, 구원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곳에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랍니다. 두번째행동…4절입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전형적인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찬양과 감사…첫 번째 것과 합하면 기도, 찬송, 감사…예배의 3요소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최선이며, 최고이며 첫 번째해야할 것…바로 예배입니다. 곤고할 때, 질병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실패로 캄캄할 때…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그 수렁에서 나오는 비결인것입니다. 세번째는 엄청난 믿음의 선포인데요. 9절 말씀입니다. 다윗의 베짱있는 신앙고백모습입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 찬송드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내가 죽으면 하나님 손해입니다. 정말 대단한 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사 면접에서 그랬다고 그래요 나를 뽑지 않으면 이 회사 손해입니다. 이런 당당한 신앙이 다윗을 다윗되게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 곤고할 때, 수렁에 빠질 때…슬픔과 원망과 탄식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 당연합니다. 그러나 한발자욱 뒤돌아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다고 해결되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다윗처럼 바울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한걸음 더 전전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기도로, 찬양으로 감사로 믿음의 선포로 다가가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손을 뻗어 수렁에서 끌어내십니다. 질병에서 고쳐주십니다. 1절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2절 나를 고치셨나이다! 아멘

3. 왜 이런 고난을 주시고, 회복시켜주시는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징계, 시련이 주는 3가지 하나님의 뜻
1)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주님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항상 건강하고, 항상 형통한 상태에서의 주님을 아는 것과 시련과 환란과 수렁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상태에서의 앎은 다릅니다. 일반적인 군인과의 전우애와 전쟁에서 작전에 들어가 죽었다가 살아난 전우들과의 전우애…다릅니다. 이런것처럼 하나님을 힘써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 30편을 인생에서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5절을 받을 때에 엄청난 떨림과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주의 노여움, 아픔으로 고통때문에 터지는 눈물, 캄캄한 밤, 이런것이 나를 연단하고 단련하는 도구이며 이것이 오래 영원하지 않고 통과해야할 터널로 아는겁니다. 그리고 주의 은총, 은혜가 나를 지배해서 나에게 충만하게 하셔서 이런 시련을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겁니다. 그래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지요. 11절,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렇게 해주실 분 나의 하나님인 것을 잘 알지요. 이 하나님을 제발 알아라고 합니다.

2)하나님은 전 인생, 전인격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제발 알라고 하십니다. 형통할 때는 찬양하고, 곤고할 때는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생이 하나님께 집중되기를 하나님만 바라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해서야 주여 하고 부르짖습니다. 아뇨 주님은 순간순간 그렇게 관계하기를 원하십니다. 시련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찾는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어려운일 있을때만 하나님을 찾는 이기적인 신앙, 자기중심적 신앙이 아니라 전 인생, 전 인격이 주님을 찾는 주바라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7절 말씀인데요. 주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주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근심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아이들이 엄마 얼굴 보이지 않으면 보일때까지 엄마를 찾아 외치듯이 이런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의 얼굴을 인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코람데요, 날마다 하나님앞에서, 사는것처럼 살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앞에서 사는 삶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라면 너무나 방자
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현존앞에서 사는 삶이 바로 주의 얼굴을 구하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과 동행하는 그런 인생 되십시오. 그러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고, 노염은 잠깐이며 주의 은총은 평생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으로 충만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