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강해(10) 막2:18~28 낡은 옛 사고를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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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강해(10) 막2:18~28 낡은 옛 사고를 버리고,새 술은 새 부대에(금식과 안식일 논쟁)
유대교적 사고를 가지고 요즘 청소년을 바라보면 방자하다고 할 것이고, 신세대 청년들의 사고로 어르신들을 바라보면 꼰대 또는 고리타분하다고 할 것입니다. 서로간의 생각, 가치관을 가지 상대방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중도에 있는 분들은 어디에 기분을 맞춰야할지 눈치보느라 자기 생각이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율법적인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자유한 복음의 사람들을 바라보면 교회가 타락했다고 하는 것이고, 신세대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율법에 메여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구세대라고 폄하하겠지요. 지금은 교회문화도 많이 자유화 되었는데요 한때는 교회에 드럼과 기타를 들여오면 교회가 망한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고, 주일을 엄격하게 지켜야한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사먹지 못하게 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 과도기가 지나고 나니까 언제 그런 신경전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다 수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유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던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면서 반대편에서는 흠을 잡기 위해서 노리고 있었고, 중도파에 있는 사람들은 당시대 경건하다고한 바리새파들과 비교하면서 어디를 따를것인지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크게 2가지 사건이 벌어집니다. 경건의 표지인 금식의 문제와 율법준수의 표지인 안식일에 대한 논쟁입니다. 이 두 사건에 대한 중심이 분명하면 신앙생활하는데 어떤 것이 맞나? 내가 제대로 믿고 있나? 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종교적 율법적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버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 그리고 기쁜 신앙생활의 맛을 겸험하는 귀한 시간 될 수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언제 금식하는가?
18~22절은 금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중도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전에도 궁금한 일이 많았어요? 일반적인 사람들이 세리와 여자와 아이는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데 선생님, 예수님은 왜 이런 죄인들과 가까이 하며, 병든 자들과 가까이 합니까? 예수님, 많은 일들을 하고 계시는데 당신을 따르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금식문제 있어서 금식이 성경적입니까?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를 먼저 살펴봐야지요. 레23장에 보면, 7월10일 대속죄일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스스로 괴롭게 하는 일이 금식인거죠. 포로후기에는 슥8:19절 네 절기, 곧 1년에 4번 금식을 했었고, 에스더9:31절에는 부림절이라고 하나가 더 추가되어 5번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시대에 와서는 바리새인들이 1주일에 월, 목요일 2번 금식을 정하여 했고,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에 동참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적 금식은 속죄를 준비하기 위한 회개의 행위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므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까이 온다는 기대감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58장에 참된 금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금식이 경건한 자의 표지인 것처럼 호도되면서 금식의 숫자와 햇수를 늘려서 자신의 종교성, 경건을 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전통이 되어 신앙생활하는데 무거운 짐, 멍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믿는 척 하려니 경건한 척 하려니 금식하고, 그리고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해 금식의 표시를 하고 다녔습니다. 마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오히려 몇일째 금식한다고 과시했다는 것입니다. 이랬는데 우리 주님의 제자들은 금식에 동참하지 않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교제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19절,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혼인집을 비유로 들면서, 혼인잔치 날 어떻게 금식할 수 있느냐? 요2장에 혼인잔칫날에는 먹고 마시지 않던가요? 여기에 혼인집 손님으로 나오는데 손님이 원어에는 휘오스=아들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혼인집 아들들로 묘사하고, 그렇다면 혼인집 신랑은 누구겠어요? 예수님 자신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잔칫집 맛을 느끼며 하나님나라의 기쁨, 천국잔치를 맛보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특히 당시대 금식하며 경건하다고 한 종교인들에게 세리와 제자들이 어울리므로 같이 죄인취급을 받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던 때에, 예수님은 지금 이들이 하나님자녀이며 지금 천국맛을 느끼고 있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더군다나 성경은 하나님은 신랑, 이스라엘은 신부로 묘사하고 있는데, 예수님 자신을 혼인집 신랑으로 묘사하므로 간접적으로 하나님임을, 중풍병치유하실때도 하나님만이 죄사함을 선언할 수 있었는데 동일하게 하나님임을 계속적으로 나타내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이들도 금식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20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을 빼앗길 때, 가깝게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같이 하지 못할 때, 이때는 예수님 없음으로 인하여 몸부림치며 회개하며 금식하며 기도해야 할것이라는 겁니다. 제자들 보십시오. 예수님과 동행,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하지 않았지만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행전1~2장에 보니까 예수님이 없음으로 인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더라. 그리고 오순절 날이 이르매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성령님이 오시고 마음에 가득해지니까 충만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이 없는 것 같다, 주님이 함께 하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 자신의 신앙을 심각하게 뒤돌아보고 회개하며 금식하며 몸부림쳐야 합니다. 금식하면서 세상의 욕심, 물질, 성공, 음식을 내려놓고 이 빈자리에 주의 말씀을 계속 채우는 겁니다. 음식을 끊고 진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금식입니다. 그러다, 주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임마누엘이 느껴지면 그때 금식의 능력, 흉악의 결박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금식은 신앙과 경건의 표시가 아닙니다.
2. 안식일은 지키기 힘든 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자유와 회복과 기쁨의 날임을 알아야 합니다.
24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23절말씀에 보면, 밀밭 사이로 자나갈때 이삭을 자르는 모습을 본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망원경으로 감시하면서 예수님 주변을 탈탈 털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안식일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예민한 문제입니까? 유대인들의 사고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우리나라가 망한것이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십계명에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일도 하지 말라. 그래서 안식일을 더 잘 지키려고 안식일에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등 규례를 만들어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안식일 금지 39개의 규정, 행동법이 있었느데 매듭을 묶거나 풀면 안됩니다. 운동화끈이 풀어졌다 그냥 가야되요, 바느질도 두 땀이상하면 안되고, 글자도 두 글자이상 쓰면 안되요. 걸음도 1999걸음으로 제한하고, 이것을 넘으면 일이 되고 여행이되는 것,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 에너지가 발생되어 일이 되어 유대인들이 거하는 빌딩에는 안식일에는 층만다 다 서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냉장고 코드가 빠져도 끼면 안되니까 옆집에 있는 이방인에게 부탁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안식일의 규정이 멍에가 되어 안식일 기쁨을 다 잃어버리고, 회복되고 충전하기 보다 휴, 안식일 지났다~하는 안도감으로 보낸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세상에서 일하며 고단하게 지냈던 그 일들을 쉬고, 분주하게 보냈던 마음을 내려놓고 창조주이며 구원주인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육적으로 쉬고, 영적으로 충만하게 하라고 주신 이 날이, 감시의 날이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고 시비를 걸어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25절, 유대인들이 잘 아는 사건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기진하여 있을 때, 살기위해서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있는 진설병, 진설병은 율법에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것을 이들이 먹었지 않았느냐? 그래서 생명을 보전된 일을 모르느냐? 하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안식일이라는 규례를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하는 것이 마땅하다! 짐승이 웅덩이에 빠졌으면 살려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 로마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안식일을 정하여 도망가지도 못하게 했던 기록도 있습니다. 안식일이 오히려 사람을 힘들게 했다고 비판하면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당시대 종교인들에게 종교의식이 중하냐? 의식, 행위, 종교보다 형식보다 생명이 더 중하다! 바리새인들이 무겁게 멍에를 지워놓은 것을 우리 주님의 멍에는 마11:30 쉽고 가볍다고 하시면서 당시대 지친 백성들에게 청량제 같은 말씀을 선포하시고 그들에게 참된 안식, 기쁨의 말씀, 복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시는 메세지 가히 폭탄같은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2:28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더 정확한 의미는 그 사람의 그 아들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 그리스도이며, 안식일의 주인으로 나는 하나님임을 또다시 선언하신것입니다. 동일하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 역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금식과 안식일 논쟁 사이 22절, 새 포도주는 새부대에 넣느니라는 이 말씀은 낡고 청산해야할 율법의식, 종교의식, 형식의 틀, 종의 신앙관을 낡은 옷에 비유하면서 복음, 예수님의 말씀은 새부대에 넣어야한다, 새부대란 복음의 마인드, 하나님자녀의 마인드,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나라 천국잔치를 맛보는 삶을 사는 마인드로 바꿔야한다, 이렇게 우리의 부대가 바뀌면, 그 안에 새포도주, 누구입니까? 우리 주님이 들어오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 안에 우리가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것입니다. 종교행위적 율법적 행위의 틀을 벗어버리고 복음의 틀, 새 마인드로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