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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눅10:38~11:4 온전한 섬김(증인의 삶)
    카테고리 없음 2021. 5. 4. 20:17

    눅10:38~11:4 주님께 집중하는 삶(부활의 증인)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하여 2년째 부활주일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있는데요. 이런 암울한 속에서 우리가 바라고 사모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주시는 주의 말씀은 형식적인 예배, 지식적인 율법 그것이 우리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중요한 것처럼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 역시 중요함을 새삼 알려주셨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멸시천대하는 원수가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이지요.
    부활의 아침에 주시는 주의 메시지, 주님께 집중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는 어디에 시간을 드리고 있는지, 무엇에 열심을 내고 있는지 깨닫는 귀한 시간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 마르다의 섬김을 통하여, 섬김의 자세, 섬김의 의도가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를 도운것은 이웃사랑, 이웃섬김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누구를 탓하지도 않고, 누구를 비방하지도 않고, 자기 자랑을 내세우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일,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홀연히 떠났습니다. 이것을 이웃사랑의 전형적인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마르다의 섬김, 마르다의 헌신은 어떤가요? 예수님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곳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예루살렘과 5리...2키로 정도의 거리인 베다니 마르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좀 많아요? 이 일행들을 다 맞아들이는 이 가정, 얼마나 분주합니까? 이 일행을 맞이한 영접한 이가 마르다입니다. 예수님 일행을 초청한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 봉사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리뛰고 저리뛰고, 분주한다는 표현, 어수선하고 바쁘고 이리끌리고 저리끌려다니는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정신없다!이지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손이 부족해요. 그런데 일해야할 마리아는 돕지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만 듣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눈치를 줘도 꿈쩍도 안하는 겁니다.
    화가 난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요청합니다. 40절,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예수님에게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마르다같은 헌신과 섬김과 열심과 열정..필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교회가 원할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섬김을 폄하하면 안됩니다. 다만, 마르다 섬김의 오류를 보고 수정할 줄 알아야겠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을 돕지 않는 그 누구를 비난하면 안됩니다. 마르다가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를 향하여 분노, 비난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정당하고 바르고 그래서 다. 나와 같이, 내 편이 되어 일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찌보면 파당을 만드는 문제입니다. 진정한 섬김은 누가 뭐래도 선한사마리아사람처럼 묵묵히 하는 겁니다. 드러나지 않아도 좋아요. 왜? 주님이 아시니까!, 이런 마음으로 섬기는 그 사람을 통하여 공동체가 원할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잘못 또 뭐가 있을까요? 어떤 일, 어떤것이 좋은지에 대한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마르다의 일, 마리아의 말씀듣는 일에 있어 예수님께서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정해주십니다. 42절,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좋은 편이 있다. 여기에서 좋은 편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두 모습은 어찌보면 율법과 복음같은 이미지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행하는 율법주의 같은 모습과 주님과 함께하는 복음의 모습, 더군다나 이 두 자매의 모습은 가인과 아벨같은 모습, 이스마엘과 이삭과 같은 모습, 에서와 야곱, 또 한편으로는 눅15장에 나오는 큰 아들과 돌아온 탕자의 모습 같습니다. 가장 좋은 모습은 주님의 품에 안기는 모습이 최고 좋은 편입니다. 마리아가 이 복음안에서 있음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향유를 부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마르다의 열심과 열정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주인되어 나와 같이 하지 않고 나를 돕지 않는 자를 비난한다면, 분노한다면, 그리고 내 하는 일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율법의 행위가 되어 바르지 않습니다. 지금은 부족해도 복음안에 있으면 평강이 지배하고, 성령에 이끌려 복음의 행동, 주님 위한 사랑의 섬김이 나롤 수 밖에 없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송곳은 드러난다고 그러잖아요.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은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복음의 일꾼, 복음으로의 열정을 드러내는 귀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복음을 받아들인 하나님의 자녀는 이제 복음의 기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에 이어서 곧 바로 11장 주기도문으로 성경은 전개가 됩니다.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듣습니다. 복음을 들은 자, 이어서 어디로 나아가야하는가?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시는데요. 마태복음과 유사하지만 누가복음은 간결합니다. 크게 4가지인데요.
    1)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 아버지이십니다. 마태복음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누가복음은 간결합니다. 아버지=아빠!,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기도하던가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큰소리로...계속 하는것처럼 보여야 하니까 뜻도 없이 주절주절...중언부언...기도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2)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기도는 주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선한사마리아인의 삶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3)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출애굽시대 광야에서의 만나 이미지입니다. 날마다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양식, 이 양식을 신약에서는 내가 생명의 떡이니, 주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없이는 생명을 연명할 수 없습니다. 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양식으로 육신의 힘을 얻듯이 주님으로, 복음으로 영혼이 힘을 얻습니다. 
    4)죄용서, 죄사함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용서했기 때문에 댓가를 바라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안에서 복음의 은혜를 누린 자는 그냥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용서의 선순환이라고 합니다. 일만 달란트의 비유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는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빚을 갚으라 말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일만 달란트를 탕감한 주인은 그를 옥졸들에게 넘긴 후 이렇게 말하였습니
    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교회는 일만 달란트보다 더 큰 죄를 용서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를 깨달은 자는 반드시 다른 이를 용서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이 없는 자는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 합니다. 멱살 부터 잡고 저주와 비난의 말을 쏟아 놓습니다. 이러한 자는 하늘 아버지로부터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첫단추인 은혜를 깨닫지 못 했기 때문 입니다. 
    5)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첫시험 아담은 실패했지요. 그 이후 모든 사람은 시험 앞에 승리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이 두려운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시험을 이기셨고, 갈보리 십자가로 시험의 원인인 죄를 다 해결하시고 부활하여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보다 이제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견디고, 이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주기도문의 기도 다음 내용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11:5~13절 말씀입니다. 여기에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밤중에 여행다니다 온 친구, 친구를 맞이한 주인, 떡을 준 친구...1번은 여행하다 기진하여 친구집을 찾아왔습니다. 준비부족일 수 있지만 친구가 있어 다행입니다. 2번이 문제인데요. 유대인은 율법에 의하여 가난한 자를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2번은 굶어죽게된 여행객 더군다나 친구에게 먹일 양식이 없는겁니다. 율법으로 말하면 이웃사랑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것이지요. 그래서 2번은 큰 과오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밤중에 다른 친구를 찾아갑니다. 11:5절, 밤중에 떡 세덩이를 꾸어달라고 8절에 간청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간청이라는 말 “아나데이아” 간청, 강청으로 번역을 했는데, 부끄러움이 없음, 뻔뻔함, 무례함이라는 말입니다. 2번이라는 사람, 밤중에 친구집에 가서 떡을 구하는 태도가 무례하고 뻔뻔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3번은 어떻게 했다고 해요? 그 친구가 예의에 벗어나고 기본이 안되었지만, 그 요구대로 주었다! 그러면서 더 쉽게 해석해주시는데요. 9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것이니라.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며 알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는 아버지가 있겠느냐 하늘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2번 떡을 구하는 이는 태도도 기본도 양식도 율법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구하니까 구하는대로 받았더라.우리가 무슨 준비가 되어야 하는가? 아무것도 갖춘것 없지만, 예수이름 힘입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부를짖습니다. 할 때, 누가봐도 참 부족하고 허물많고 죄많은 모습이어서 응답이 내려올것같지 않는데...아니라는 겁니다. 후히되어 흔들어 눌러서 좋은 것을 주시는 분,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는데 은혜입니다.
    복음안에 있는 사람, 이 은혜속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채우려고 힘쓰지 말고 복음안에서 주의 사랑안에서 주님안에 있으면, 안 다 안 다 네 필요를 아느니라 하시면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이며 응답입니다.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 마리아의 주님앞에서 그리고 기도는 서로 다 연결 되어 있습니다. 예수믿는 자 이런사람이라는 것, 다른 것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만 필요합니다. 마리아의신앙...그 신앙의 기도의 능력으로 성령의 힘으로 사마리아인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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