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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눅9:28~48 무리인가? 제자인가?(2)
    신약 강해/4복음서 2021. 4. 8. 19:59

    눅9:28~48 무리인가? 제자인가?(2)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내 보내실때 능력과 권위를 주어서 내보셨어요? 주님이 주신 병 고치는 권능과 권위를 덧입고 나간 제자들,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더라. 스승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자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스승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배우는 자 입니다. 그런데 스승님처럼, 주님처럼 안되는 겁니다. 이때 사역자, 전도자, 선교사들이 사역의 딜
    레마에 빠지면서 힘을 잃습니다. 전에는 능력이 나타났었는데 지금은 왜 안될까?  안 되는 이유 원인이 무엇일까?

    1.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할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눅9:28절 이하의 말씀, 변화산 사건입니다. 용모가 변화되고 =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의 희어져 광채가 나는 사건, 더군다나 모세와 엘리야선지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합니다. 이 사건은 높은 산에서 나타난 일이지만, 27절 말씀과 연관하여 보면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무엇을 의미할까? 모세 하면 율법을 대표하지요, 엘리야선지자 하면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더군다나 눅24:44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고 하신적이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 곧 구약을 말하고, 하나님말씀을 말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구약에 그리스도의 예언에 대한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데 있어 가장 힘든 것이 십자가의 죽음인데, 이것에 대하여 다시한번 짚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눅9:31절,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예루살렘에서 고난 받고 죽으실 것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런 고난 수난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미리 알고 계셔서 제자들에게 암시를 주었습니다. 22절,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난, 죽음, 부활...한 마디로 복음에 대하여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특히 변화산까지 올라간 선두제자그룹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어때요?이들이 직접 듣고 본 것이 무엇입니까? 
    1)눅9:22,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서 예수님께 직접 들었습니다.
    2)오늘 본문의 말씀 32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3명, 베드로 요한 야고보인데요, 3명인 이유는 재판때에 증인의 효력이 확실하다는 것이고, 비몽사몽간에 본 것이 아니라, 온전히 깨어나...바른 정신으로 보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본 것, 홀연히 변한 예수님의 모습...이것은 천상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는 모세와 엘리야선지자를 보았습니다. 이런 모습 한번 보면 평생토록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떤 젊어서 남편을 보내고 홀로 지내신 분이 남편이 사랑한다 는 그 한마디에 꽂혀서 평생을 수절하고 지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요. 우리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변화산 사건 한번 경험하면 평생 가슴떨리는 주의 사랑을 가지고 살 것 같아요. 그런데 제자들 그렇던가요? 이런 앞으로 되어질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듣고 또 들었지만, 막상 그런 일이 눈 앞에 일어나니고 자신들의 생명의 위험이 감지되니까 줄행랑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말을 보십시오. 33절,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고 합니다. 이 의미는 여기가 좋사오니 더군다나 주님을 여기 초막에 계시게 하겠다는 겁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고난과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데 주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고, 더군다나 이 의미는 하늘 영광을 덧입으신 예수님을 내가 지은 초막에 모셔두겠다는 겁니다. 나 혼자 독식, 또는 하나님을 내 생각으로 끌어두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틀 속에 하나님을 가두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베드로의 마음 이해가 되긴 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지어놓고 주님과 어와둥둥 평생을 거하겠다는 마음이잖아요?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 하면 주님이 좋아하실거야 하는 자기 생각의 틀로 주님을 가두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에게 있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는것이 좋겠어요? 자기들과 함께 영원히 있는것이 좋겠어요? 내 생각, 우리의 바람과 주님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주님의 뜻을 미리 다 알려주셨어요. 더군다나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선지자를 통하여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내생각은 이러면 안되, 그러니까 그런 내 성에 차지 않는 말은 들어오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고 한귀로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 용모가 변화되고 광채가 빛나는 천상의 세계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대할때, 설교를 들을 때, 누구의 충고를 받을 때, 내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것만 가려서 읽고 들으면 안됩니다. 쓴소리도 들어야 하고, 고난의 말씀도 채찍과 징계의 말씀도 듣고, 회개하라는 말씀도 들어야지...잘한다. 잘한다는 좋은 말만 들으면 온실속의 화초처럼 힘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 듣는 취사선택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인줄 알고 그대로 받아들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탐욕과 갈등의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산 위에 있는 제자들 역시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산 아래 제자들은 어때요? 귀신에 들려 넘어지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귀신쫓아달라고 부탁하였으나 40절,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전에는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고 예수님이 하신 일 다 행했었는데 뭐가 잘못되었을까? 이들 역시 두가지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1)산위에 제자들과 똑같이 들은 말인데요. 왜, 우리 주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된다는 겁니까? 이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우리가 이 고생하려고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까? 이 모습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한 이미지입니다. 홍해바다를 건너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꿈의 고향 가나안으로 직행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광야로 들어가 물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는곳이 나옵니다. 이게 뭐야? 애굽이 그립다 하면서 신앙의 밑천이 다 드러납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능력받고 권능받고 질병치유하고 귀신쫓고 그런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고난 십자가의 길만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갈등이 불처럼 일어나지요. 이런 갈등이 바로 불신앙이며 패역한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타하십니다. 41절,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패역하다는 말은 왜곡 비틀어졌다는 것입니다. 능력과 출세에 마음이 비툴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행8:17 사마리아에서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시몬의 관심은 죄사함, 회개, 구원, 복음이 아니라 안수하여 성령받게하는 권능에만 있습니다. 제자들 역시 고난에는 관심이 없고, 고난의 길을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권능에만 집중하니까 그렇게 잘 나타나던 치유와 축사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겁니다. 
    2)산위의 제자들과 산아래 제자들이 나누어졌잖아요. 누구는 선택받고 지명받고, 누구는 여기에 있어야하느냐고요? 하면서 선택받지 못한 상실감에 낙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때 믿음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비뚤어져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책망하시지 않습니까? 마음이 비뚤어졌다. 속이 상해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귀신을 쫓을 때, 귀신이 나가겠습니까? 하나님의권능과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나겠습니까?

    3.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으로 사역할 때 아무일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변화산사건, 그리고 산 아래에서의 귀신들린 아들 축사사건 이후 제자들의 관계가 어떠한가 보십시오. 46절,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누가 크냐? 누가 예수님과 친하냐? 인정받고 있느냐? 인정받고 싶은 욕구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누구든지 부모에게,  친구들에게, 선생님에게, 직장 동료 상사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씁니다. 잘하는 사람으로, 능력있는 사람으로 드러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월감을 느낄때 존재감을 느끼지요. 그런데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 비교의식, 이런것들이 마음을 피폐하게 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힘들게 합니다.
    제자들 보십시오. 누가 크냐? 이 말을 잘 들여다보면 각자 자기가 가장 큰 자라는 겁니다. 상대방과의 비교하면서 자기 우월성을 드러내고, 상대방은 짓밟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을 품은 대표적인 사람이 첫번째 살인자 가인과 이스라엘 첫번째 왕인 사울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비교대상인자를 죽이려는 살인의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마음을 품은 자에게 무슨 권능이 나타나겠습니까? 누구보다 크냐라는 생각보다, 누구보다 나는 작다는 패배감보다...진정한 제자는 나는 선택받은 제자야, 이 축복받은 제자야, 나는 하나님의 자녀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 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프라이드, 사랑받는 자녀라는 관계를 품고 불러주신 스승을 따르면 스승처럼 하게 되는 겁니다. 누구는 능력이 있어 차별 비교하지 말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 주께 대한 믿음에 집중하면 주님이 약속하신 권능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무리인가 제자인가? 두번째 시간으로 제자는 스승이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난이 기다린다 그곳으로가련다 하시면, 아멘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꾸려고 할 때, 사단아 물러가라는 호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는 산위로 불러가고 누구는 산아래에 있어야 하고, 스승이신 주님이 누구는 데려가고 누구는 머물게 하고, 누구는 성도를 많이 맡기고, 누구는여전히 개쳑교회에 있고...비교하지 말고 맡겨주신 일에
    감사하면 그 자리에서 해같이 빛나는 일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좋고, 편한 자리에 있을 때, 여기가 좋사오니가 아니라, 내 대신 힘들게 사투를 벌이고 있는 자리, 또 우리를 기다리는 자리로 빨리 움직이는 것, 그것을 볼 수 있는 자가 바로 진정한 제자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는 제자들이 많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과 위엄이 드러날것이며,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실제가 되게 하며, 무너지고 황폐한 이 땅이 회복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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