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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눅9:49~62 무리입니까? 제자입니까?(3)
    신약 강해/4복음서 2021. 5. 1. 10:54

    눅9:49~62 무리입니까? 제자입니까?(3) 진정한 제자도

    사람은 도토리키재기식으로 비교를 합니다. 상대방보다 우월하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래도 안되면 짓밟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요즘 선거판의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이 비교의식이 가인과 사울왕처럼 자신을 좀먹는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인 것입니다. 자녀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보다 잘해야되, 1등해야되...이런 것들이 결국 자녀교육을 망치는 주범이기도 합니다. 1등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과 가치관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고, 1등보다,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성경적인 교육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품어야할 비전입니다.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아직도 세상가치관이 나를 이끄는지...자신을 진단하는 귀한시간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다 잘못되었다는 오만과 편견이 있는가?
    눅9:49~50절, 어떤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예수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이에 요한이 총대를 메었다기보다는 요한의 성정입니다.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 불이잖아요!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므로 금지 시킨 장면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은 그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예수님의 이름은 믿음 없이 부르면 능력, 효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믿음도 없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다가 오히려 귀신들린 사람에게 제압되어 도망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사람이 예수님의 공동체를 따라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역을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조직을 중심으로 편을 가른 모습입니다. 여기서 금하였다는 단어는 1인칭 복수로서 “우리가 금하였나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마음은 요한만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제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마음입니다. 
    도대체 제자들은 왜 이렇게 했을까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편파주의에 빠지면 이렇습니다. 더 큰 이유는 자기는 능력도 없으면서 외적 지위만 가지고 능력은 있지만 외적 지위가 없는 사람을 박해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조금 전에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능력은 이 사람이 더 큽니다. 반면에 외적 지위는 제자들이 예수님 공동체에 속해 있고, 이 사람은 속해 있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외적 지위로 다른 사람을 박해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사람을 금하지 말고 포용해주라고 하십니다. 5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해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악행이 아니라면 나와 다른 행동도 포용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내편, 저편, 교단, 교파, 지역, 학벌, 단체로 편가르지 말고,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이름으로 행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요 우리 식구라는 인식으로 폭넓게 수용하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 반대로 우리가 비난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돌아가는 것이 제자도이고, 능력입니다.
    51절,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사마리아를 통과하시려고 하실 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 곧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갈보리를 향하여 가시는 길입니다. 이 길을 사마리아사람들이 막는 것이잖아요?
    이에 대하여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 불인 야고보와 요한의 형제가 나섭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다 불태워 죽일까요?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면 지름길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부정한 사마리아를 피해서 우회도로를 이용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어디가 되었든 복음의 길이고, 구원의 길입니다. 축사와 치유를 행하신 것도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목적이 분명해요. 그런데 이 전도행렬, 구원의 길을 누군가가 막아선다고 해서, 요한의 형제처럼 불을 내려 맞서면 그들과의 관계는 싸
    움의 관계가 되는 것이고, 그들에겐 복음의 소식을 전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사마리아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왜 막아섰을까요? 53절,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이라고하잖아요? 만약에 예수님일행이 그리심산을 향하여 간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대 환 영을 하였을것입니다. 이들 역시 자기가 섬기고 예배하는 그리심산에 오면 내편이고, 예루살렘으로 가면 반대편이라는 편견과 오만으로 막아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엔 예수님 일행이 거부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56절,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이 행동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행동강령으로 주셨던 내용이잖아요? 눅9:5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삼으라. 싸우라고 하시지 않잖아요? 사도바울은 어때요? 행13:50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쫒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하여 가
    거늘...행14: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반대를 만날때, 복음전하는것, 구원이 목적이 되므로 그들과 맞서 싸우지 않습니다. 편견과 감정으로 큰 대사인 하나님의 일을 망치면 안되는 것이지요. 무리들은 어때요? 자신의 힘, 기득권, 물질, 공동체를 다 동원해서 자신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자들을 짓밟는 것입니다. 반대로 제자는 맞서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품는 것이지요.

    3. 제자는 빈털털이 노숙자의 삶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눅9:57~62절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절정입니다. 본문에 세 사람이 나오는데요.
    1)57절,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대단한 결단이며 각오입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매정할 정도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면서 찬물을 끼얹는 모습입니다. 그 다음 소식은 없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을 떠났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저의, 또는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세상가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나도 능력받고, 인정받고, 축복받고, 건강하고, 그러겠지!. 현세적, 세상적, 예수믿으면 부자된다는 번영복음의 마음, 기복신앙은 아무리 열정이 있는것같지만, 결국 주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리이다는 열정보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집이 없어도, 노숙을 해도 그래도 따르겠다는 각오가 진정한 제자도인 것이지요.
    2)59절, 이번에는 주님께서 지정을 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에 대한 반응, 나로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0절,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3)세번째 사람, 61절,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에 대하여 62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두번째, 세번째 사람을 통하여, 아버지 장례문제, 가족에게 작별의 문제를 효에게 연결해서 기독교는 불효자의 종교라고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효, 가정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본질은 가정과 장사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이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죽은 자라는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혼구원의 문제이며 하나님나라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일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 그 일은 그런 사람들에게 맡기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은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 시간을 뺏기지 말고,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 즉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일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첫째,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시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 전파하는 일이라면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어떤 일로도 방해를 받지 말고 최선을 다해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한 번 세상의 중요한 일을 위해 예수님 따르는 것을 중단하게 된다면 세상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 따르는 것을 중단하는 습관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로 중요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기 어렵습니다. 세상 욕심을 위한 일을 먼저 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시급한 일을 만나면 신앙생활을 뒤로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3이 되면 공부를 위해 신앙생활을 뒤로 미룹니다. 회사일이 바빠지면 그 일 때문에 신앙생활을 뒤로 미룹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나도 구원받기 어렵고 세상도 구원하기 어렵습니다.
    무리입니까? 제자입니까? 나와 다르다고 해서 정죄 비판하는 것, 노!!!!!!, 나와 다른 사람이 비판의 공격을 해와도 맞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마음을 품고 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마음이 흐려지기 때문에 반응하는 거거든요. 우리의 살길은 오직 십자가!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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