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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눅10:25~37 강도만난 자의 이웃, 선한 사마리아인
    신약 강해/4복음서 2021. 5. 2. 16:10

    눅10:25~37 강도 만난 자의 이웃, 너도 이와같이 하라

    참 세상이 각박하고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보면 혼자 있는 듯 쓸쓸한것같기도 하고요. 더군다나 주변을 보면 독불장군식 사람들,  극단 자기이기주의자 같은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가끔 주차장에 보면, 두개의 주차선을 먹고 있는 차도 있고, 앞에 주차구역이 있는데도 가로막는 차들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인의식, 또는 남을 배려하는 의식, 이런것들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더라. 세상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나가려 하고, 주차장에서 먼저 나가려고 시비거는 모습들을 볼 때 눈살이 찌뿌려집니다.
    사소한 이야기 같지만, 이런 문제들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이웃에 대한 정의, 이웃사랑에 대한 삶의 실천 부분이 약해서 그런것입니다. 오늘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타인을 향한 십자가를 지지는 못할지라도 타인을 향한 정의를 다시한번 새겨보는 복된 시간 될 수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구원은 내가 무엇을 행해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누가복음10장 전반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신나는 모습입니다. 싱글벙글 축제의 모습입니다. 12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든자들을 고쳤습니다. 또, 70인 전도대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돌아와 기뻐하며 찬양하며 선교보고를 하는 축제의 모습입니다. 이에 우리주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늘백성, 하늘시민권을 얻었다는 뜻이요, 구원, 영생얻었다는 것입니다. 잔치집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이때,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가 등장합니다. 25절,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의 의도, 목적이 시험, 무너뜨리기위한 계략, 미혹, 함정입니다. 건전하게, 또는 무엇을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사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의 관심사입니다. 세례요한이 이렇게 심판을 부르짖었잖아요?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이에 무리가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눅3:12 세리들도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할까?에 대한 고민이 있다는 것입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도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거듭난다. 곧 구
    원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눅18장18절이하에 보면 어떤 부자관리가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오늘 율법교사는 인생의 고민이 아니라, 문제의 의도가 시험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유대인들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교사 역시 잘 알고 있는 문제입니다. 신6:5절, 레19:18절을 종합하여 27절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100점입니다. 율법교사의 답에 대하여 28절,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교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질문하니까, 답은 그래 이렇게 살아라! 율법교사는 영생을, 구원을 무엇을 행해야지 하는 자신의 선행과 노력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실천, 삶의 행동을 주유소 쿠폰처럼 이해하여 내가 무엇을 하면 그에 걸맞는 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구원관은 내가 내가 구원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의공로, 나의 선행이 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나올수가 없어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지 누구의 도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장로교 합동교단은 사순절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로마카톨릭에서 사순절동안 금식하며 고난에 동참하는 자기 노력, 자기 신앙 과시가 드러날 수 있기에 이것을 의도적으로 막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대한 감사보다 내가 이렇게 고난에 동참했다는 나의 노력, 나의 종교성...
    구원은 나의 노력, 나의 기도, 나의 고난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 하나님의 은혜인것입니다.  구원관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평생을 쌓아도, 평생을 뛰어도, 한 자도 세울 수 없습니다. 내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이렇게 질문한다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렇게 답을 주시겠지요?
    엡2: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100점 하면서  28절,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부자관원도 이런 답변앞에 머리를 숙이고 예수님 반대편으로 쓸쓸히 뒤돌아 갑니다. 그런데 오늘 율법교사는 또 한번 도발합니다.
    그럼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내 몸처럼 사랑할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듯이 가까이 있는 이웃을 말합니까? 어떤 사람은 남편이 웬수, 평생웬수, 자식은 망할놈,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이런데 ... 이때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30절 이하인데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아니 무슨 일이래, 거기를 왜 혼자가 가..그러면, 강도만나기 십상이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는 급격한 내리막길의 산으로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라 혼자서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랍니다. 시골 장수에는 경상도를 잇는 60령고개가 있는데 60명이 모여서 재를 넘어간다는 옛말이 있는데 그런곳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강도만났다는 말에 동정심
    보다는 왜 그랬데? 오히려 당한사람에게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구할 사람이 등장하는데,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고...안타깝게도 그냥 지나갔다. 그 다음 레위인이 등장하는데 그 역시 피하여 지나갔다! 안타까운 탄식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이 말이 나올 때, 아무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사마리아는 수백년동안 원수같은 앙금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보다 더 
    깊은 상처와 한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개되지취급하듯 부정하게 여겼고, 이런 멸시천대를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사람이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기름과 포도주 극상품을 다 붓습니다. 주막 주인에게 여관비까지 지불하고, 더 들면 다음에 갚게다고 약조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답변 잘하는 율법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당연히 사마리아사람입니다. 이렇게 답을 해야되잖아요? 그런데도 사마리아라는 말을 붙이기 싫어서, 힘들어서, 자비를 베푼자입니다. 참 마음이 쫌생이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일까요? 강도만난 자, 슬픔을 당한 자, 환난을 당한 자,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그 사람은 그들에게 멸시천대 조롱을 받은 자입니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마음에 두지 않고 손을 뻗었고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들을 내어주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요? 우리가 그 사랑, 나를 향한 주님의 십자가 사랑, 그것을 받았기 때문에 못한다가 아니라,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하는 것이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누가 강도 만난 자 일까?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강도만난 자, 비참합니다. 아무도 돕지 않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환경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기 혼자 가다가 이렇게 당했다고 봅니다. 자기 의로 사는 자, 자기 욕심으로 사는 자, 자기가 주인되어 사는 자입니다. 성경은 이런 것을 죄라고 합니다. 삿21:25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왕이 없어,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다. 이것이 바로 사사기에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53: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각자 도생, 각자 자기마음대로 간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자 처럼 소망없이 절망속에 어둠속에 있게 된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입니다. 나 입니다. 강도, 공중의 권세잡은 자 마귀에 끌려다녀 죽을 수밖에 없는 자 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분이 오셨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업어주십니다.
    이 모습을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사53:6 여호와께서는 우리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를 짊어지신 주님, 우리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은혜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얻었도다! 그래서 강도만난 자가 우리이며, 도우신 선한사마리아사람이 바로우리 주님이십니다. 이 은혜를 누리고 이 은혜를 아는 자가 바로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되어 도울 수 가 있습니다. 너도 이와같이 하라는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권위와 권능만 받은것으로 아는데요. 마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마14:14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주시니라. 마20:34  여리고 소경들을 불쌍히 여기사 Compassion, 연민, 동정, 긍휼입니다. 이것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볼 때 그냥 지나갈 수 없습니다. 가장 무서운 죄가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교욱의 반대 역시 무지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삶의 반대 역시 죽음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죽어가는 영혼을 향한 무관심? 값없이 받은 사랑, 이제는 댓가를 바라지 않고, 따지지도 않고, 기대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내세우지 않고...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차별적으로 받은 우리의 사명, 우리의 할 일입니다. 
    너무도 잘 아는 썬다씽의 일화, 히말랴야의 눈꽃이라는 책에, 전도여행을 가는데 앞을 분간할수 없는 눈보라속을 지나는데 어떤 이와 동행하게 되어 힘이 되었답니다. 한참동안 사력을 다해 산길을 가는데 추위에 웅크리고 있는 죽어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거의 얼어죽은 사람앞에서 썬다씽이 업고 가지고 제의하는데 동행하는 사람은 그냥 지나쳐갑니다. 그러다가 우리도 얼어죽어요 나는 살아야겠소 하면서 매정하게 버리고 갑니다. 썬다씽은 죽은 목숨같은 그를 들쳐업고 눈보라길을 걸아나갑니다. 고개마루쯤 가는데 웬 동사체...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몇시간전에 자기 혼자 살겠다고 가버렸던 그 사람이었더랍니다. 썬다씽은 죽어가는 그 사람을 업고 눈보라를 가면서 땀을 흘리며 온기를 전해주므로 서로가 살았다는 것입니다.
    왜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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