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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눅17:11~21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누리는 자
    신약 강해/4복음서 2021. 9. 6. 18:00

    눅17:11~21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는 자(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 주변에는 제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리와 창기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쓴소리를 내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삶의 방향성을 알려주시고, 세리와 여자들 그리고 사미리아 사람들을 위로하시기도 하십니다. 그 대상을 향하여 분명한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느냐?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예수님을 등지는 자가 되고 말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자 그렇지 못한 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자와 그렇지 못한 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계속적으로 대비되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17장은 구원받은 자의 기쁨을 누리는 자는 어떤 자인가? 이런 기쁨의 대열 곧 하나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는 어떤 자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 10명의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고 그 중에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오는 장면을 통하여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안타까운 주님의 탄식 아닙니까? 구원, 치유는 주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럼, 하나님의은혜를 받는 자는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10명의 나병환자처럼 우리는 구제받기 힘든 영혼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12절,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성경의 관점이나 당시대 사회적인 눈이 바라보는 나병은 저주받은 병이라는 인식입니다. 더군다나 전염성이 있어서 사람들 가까이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처럼 격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에 가장 큰 이슈는 예수님의 등장입니다. 중풍병자도 나병도 치유가 되고, 죽은 자도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알고 있는 나병환자들에게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가까이 나아갈 수도 없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몸부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멀리 있지만 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부르짖는 것입니다. 13절,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불쌍히 여기소서…대부분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돌팔매를 하고 있는 상황속에서 제발 제발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돌봐주십시오!라는 간절한 간청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정확히 인지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여, 구원자시여 메시야시여 부르지 못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예수선생님이여~~~하면서 부르짖는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한마디 하십니다. 14절,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그저 할 행동지침만 주고는 끝입니다. 이에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성경과 당시대 문화는 나병이 나았는지의 검진을 제사장이 합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은 눈으로 고침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제사장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치유의 첫걸음, 구원의 첫출발입니다.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뵈어도…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선행, 행함…이들이 한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14절 후반절에 보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가다가 치유받았습니다. 10명의 나병환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힘으로 치유받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 자신의 노력과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나병의 가장 큰 병의 증상가운데 하나가 무감각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살과 뼈가 떨어져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알지를 못해요.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 나병은 죄의 성격과 너무도 비슷합니다. 죄에 빠지고 죄에 끌려가는 모습이 나병과 거의 비슷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바로 이런 존재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내 선행으로, 내 믿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10명의 나병환자처럼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모습은 5절 말씀과 상당부분 연관이 있습니다. 5절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간청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이 요청은 누군가가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네게죄를 짓고 일곱번 네게돌아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삶의 지침을 듣고…성인군자도 아닌데 그런 상습범을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3번만 용서하면 크게 용서한건데..더군다나 마18:21~22 제가 일곱번 용서하면 될가요? 아니다.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죠. 이런 말씀앞에 주여 현재 믿음가지고는 감당할 수가 없사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한번 더 강력한 믿음을 촉구하는 말씀을 주시는데요. 눅17:6절,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겨자씨 만한 믿음, 가장 작은 씨의 상징이 겨자씨인데 이렇게작은 믿음일지라도 있으면, 뽕나무를 명하여 바다에 심기어라고 명령할 수 있고, 뽕나무는 그 명령에 순종할 것이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니까 제자들이 믿음이 있어요? 없어요? 예수님이 보실 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줄 알고,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하니까 어찌보면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먼저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제가 믿음이 없어요., 믿음을 주십시오. 나병환자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우리는 너무나 믿는 체, 있는 체 합니다. 없으면 없다고 해야되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살길이요, 주님의 은혜를 받는 출발선입니다. 주여! 믿음을 주십시오. 주여 은혜를 주십시오. 아멘

    2.은혜를 경험한 자, 치유를 받은 자, 더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을 더하는 지름길입니다.
    10명의 나병환자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을 순종하고 제사장에게 발걸음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이것 역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다가 돌팔매 맞아 죽을 수도 있고요. 병이 낫지 않으면 제사장도 부정하여 격리해야 되는겁니다. 그러니까 나병의 진물이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간다는 것은 믿음이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믿음의 출발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가다가 눈에 보이게 몸이 치료되는 것이 보인것
    입니다. 본인이 알잖아요. 그러자, 더 급히 제사장에게 달려간 사람이 있고, 이 상황에서 돌아서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빨리 달려간 사람들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제사장에게 검진을 받아 가정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고, 예수님께 돌아온 이 사람은 율법의 행함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이 사람의 고백을 보십시오. 15절,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누가 치유해주셨어요? 예수님이 치유해주셨잖아요. 예수님을 누구로 보는겁니까? 하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메시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아래에 엎드리어 예수님께 부복, 충성, 종으로서의 자세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배가시키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간청했을때, 이런 말씀도 겸하여 주십니다. 눅17:7~10절, 종이 밭게 가서 일하고 밥때가 되면 주인에게 밥 차려 드리고, 수종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명한대로 했다고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종은 이렇게고백해야한단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뭘 했다고 인사받으려고 하면 안된단다. 마땅히 우리가 할 일이다. 
    10명의 나병환자 가운데 돌아온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앞에 그저 감사해서 무릎꿇고 엎드리어 있는 모습. 이 모습이 바로종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배가시키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주님앞에 어떤 모습입니까? 아직도 부족합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큰 은혜도, 큰 치유도, 큰 감사거리도없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아는 것이 이 세상을 주고도 갚을 수 없는 큰 은혜 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은혜이니까요! 나병환자가 치유받은것처럼 죄로 썩어가는 우리를 주님이 구원하여 주셨잖아요. 우리가 돌아온 탕자처럼 그런 존재아닙니까? 나병환자처럼 치유받은 자 아닙니까? 날마다 주님앞에 엎드려 감사하는것 마땅합니다.

    3.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누리는 자가 됩시다!
    예수님께서 치유받아 돌아온 사마리아사람을 향하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구원이야기를 끄집어 내니까 듣고 있던 바리새인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럼, 하나님나라가 어느때에 임합니까? 이들은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때, 시기를 묻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볼 수 있다 없다! 없다! 21절,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다고 그래요? 너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가지 하나님나라의 표현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바리새인 제자들 이 현재 있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삥 둘러서 있지요. 삥 둘러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계세요? 예수님이 계십니다. 너희 안이라는 것은 삥 둘러선 가운데 있는 분,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실제 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분
    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너희 안에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 안, 마음에, 심령에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누가 있어요? 예수님이 계시지요. 그러므로 우리안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져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실제하는 하나님나라인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소유한 자, 누리는 자는 이것이 있어요.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누가복음 17장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소유한자의 삶입니다. 용서하고,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않으며, 돌아온 나병환자처럼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 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먼저 믿음을 주시고, 믿음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하나님나라의 실제가 우리 삶 가운데서 나타나기 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말씀에 이끌려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삶을 살게 하소서.
    믿음의 가치는 생명력입니다. 겨자씨같은 믿음만 있으면 이 믿음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큰 믿음으로 어느순간 자라있을 것입니다. 주께 대한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마다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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