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4월16일이 세월호8주기인데요. 아들 또래 아이들이 갇혀버린 배가 기울고, 물이 차오르고 아이들은 서로를 다독이며 구조를 기다렸지만 바람은 수포로 지나가버려 304명이 죽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구조방송만 메아리치고 그렇게 기다리던 구조팀은 들어오지 않고 호흡이 멈추어갈 때, 이러한 때가 터가 무너져내리는 날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모 가족 친지들 역시 터가 무너져내려 주저앉아 탄식할 수 밖에 없지요. 며칠전 대구치유집회에서 40대 여성분이 눈이 침침해서 병원에 갔더니 시력이 점점 상실된다는 망막색소변성증의 진단을 받고 벼락맞은듯 상실감에 빠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역시 터가 무너져내린 모습입니다. 성경에 터가 무너져 내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눅8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갈 때 예수님을 모시고 부지런히 가던 길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 터가 무너져내린 모습이지요. 이처럼 어느날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는 터가 무너져내린다고 합니다. 다윗도 역시 터가 무너져 내린 사고를 만납니다. 그렇게 의지하던 사울왕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공격을 받아 죽음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역시 터가 무너져내렸습니다. 이때 다윗이 우리에게 길을 제시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절대절명의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해결방법을 깨닫고 문제를 넉넉히 이겨내는 믿음의 용사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터가 무너져 내릴 때 세상사람의 말, 세상방법 1절 말씀인데요,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합니다. 새 같이 빨리 산으로 도망가! 이것이 세상사람들이 터가 무너질 때, 서 있는 기초가 흔들릴 때 취하는 방법이고, 우리에게 하는 말들입니다. 먼저 소나기는 피하고 봐야지, 먼저 살아야지…어찌보면 솔깃한 말이고, 타당성이있고 상식에 맞는 것 같고 귀에 솔깃하고 달콤하게 들려옵니다. 사실 그런 위급한 일을 만나면 누구나 도망치고 싶고 악한 자일지라도 타협해서 도움을 받고 싶어요. 누구라도 붙잡아 우선 살고 싶고,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아닙니까? 그러나 이런 세상의소리 세상의 방법이 믿음을 포기하게 합니다. 잠시 피할 길을 줄 수 있지만,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고, 주님 앞에 그저 부끄럽고 수치감이 밀려오는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하고, 후회함이 없어야하거든요. 미련이 없어야하거든요. 다윗 보십시오. 산으로 도망하라는 주변 친구들의 권면앞에 이렇게 선포합니다.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가? 나는 결코 그럴 수 없노라! 선언하잖아요. 우리에게는 이런 역사의 교훈이 있습니다. 일제 36년간의 식민통치하에 있을 때, 천황폐하 하면서 신사참배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끝까지 거부하며 순교자가 되었던 분이 계셨고, 신사참배에 참여해서 살아남았던 자가 후에 회개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는 계속 되풀이되었습니다. 독재정권을 미화하고 찬양했던 부류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그렇게 타협하여 영화를 누리고 높임을 받는 것 같고, 끝까지 정도를 걷는 분들은 핍박을 받아도 한결같이 신앙을 표현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오늘 1절 말씀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 조금만 세상과 타협하면 누리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외치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외치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선포는 또 어떻습니까? 행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산으로 피하라, 적당히 하라는 세상의방법에 타협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2. 그렇다면 다윗이 선택한 행동, 믿음의 방법은 무엇인가? 3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다윗도 황망한 일, 기둥처럼 믿고 붙잡았던 것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일 당합니다. 믿었던 아버지같은 사울왕으로부터의 공격, 죽음의 위협앞에 다윗의 행동을 보십시오.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다윗은 단호했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피하겠다! 나는 이 문제를 주님께 직언하겠다! 이 모습은 법과 질서, 상식, 기초가 무너진 사회에서 현실도피가 아닌 오히려 과감하게 믿음으로 정면돌파하는 모습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었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도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결단이요 선포입니다. 이런 믿음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4절,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 계시는 곳, 하나님이 계신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곳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골리앗 같은 큰 산 앞에서도,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같은 강대국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하나님품안에 있는 믿음, 하나님이 붙들어주신다는 믿음, 하나님이 감찰하신다! 하나님이 보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정면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11편의 위기에서도 다윗은 피하라 도망가라는 주변 사람들의 충고를 뒤로하고 성전, 곧 하나님 품으로 달려가 하나님을 붙잡는 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합2:20절에 하박국선지자가 외칩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하박국선지자 시대 얼마나 암울한 현실입니까? 바벨론에 초토화되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입니다. 꺼져가는 심지처럼 나라의 큰 기둥이 무너져버릴 때, 하박국선지자가 본 것은 나라가 망했다고? 나라의 기초가 다 무너졌다고? 그러나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신다! 주님만 계시면, 망한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망이요 희망이다!, 이 모습을 베드로가 보여줍니다. 풍랑이는 바다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소리치다가 주님인 줄 알고, 주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마14:30 베드로가 외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주님이 피난처요, 주님이 안식처며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하나님이 진정한 피난처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승부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이런 강력한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나옵니다. 11편에서 다윗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4절,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고, 보좌는 하늘에 있다고 하잖아요? 성전에 계신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백성 중에 임재하여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 우리 안에 계신다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말합니다. 또 하나, 여호와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고백은 하나님의 초월성, 모든 인간보다 위대하시고 초월하여 계시는 분, 능력이 한이 없으시고, 하늘에서 보시니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분,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통촉, 감찰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잖아요? 시금하다, 분석하다는 뜻인데…화열시금법이라고 금을 뽑아내는것인데 욥이 이렇게 고백한적이 있습니다. 욥23:10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다윗도 이런 고난이 찾아온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신 것이라 이때 믿음을 보여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감찰, 통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니까 당연히 주님을 찾고 붙잡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 나한테는 간섭을 안하시나 부정하고 미지근하니까 하나님께서 계속 불을 지피시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 인생을 통촉하시고 감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표안에서 드디어 일을 하시는데요. 6절,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고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을 악인들에게 잔의 소득으로 주십니다. 불과 유황의 잔…한마디로 사약이잖아요. 지옥잔이잖아요.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니 하면서 주님 품으로 달려들어간 다윗같은 믿음의 용사들에게는 무엇을 상으로 주실까요? 7절,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라! 숨어계신것 같은 하나님이 얼굴을 보여주십니다. 모세도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뒷모습만 보았었는데, 주의 얼굴을 보여주신답니다. 아이가 울다가 엄마가 까꿍하고 나타나면 그 모든 슬픔이 떠나가는 것처럼 주의 얼굴을 보면, 그동안 당했던 모든 억울한 일, 슬픈 일, 아픈 것, 다 봄눈 녹듯 사라지고, 주님만 보이는 겁니다. 우리 주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어 세상이 다 끝난것 같았던 제자들과 따라다녔던 여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주일새벽미명 무덤앞에서 주님을 만난 막달라마리아의 기쁨, 주님이시다! 하면서 달려간 제자들의 모습…끝났다 하는 순간에 나타난 주님을 만나고 엔돌핀 기쁨이 폭발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님 한분이면 족하다. 주님으로 충분하다, 주님만 있으면 된다는 이 믿음으로 힘들고 어려운 이 때를 잘 견디시다 보면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만지시고, 우리안에 임재하시고, 싸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주님만난 기쁨과 감격이 회복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터가 무너지는 환난과 시련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지름길이요 주님 만날 때 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