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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눅3:1~6 주의 길을 준비하라
    신약 강해/4복음서 2021. 2. 18. 08:33

    눅3:1~6 주님을 소개하려면..., 주의 길을 준비하라.

     

    유행이 반복되듯이 역사 역시 반복된다고 합니다. 반복되는 시대를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은 문화, 역사를 준비할 수가있습니다. 성경역사를 보더라도 고난과 핍박과 환란이 극에 달한다...점점 더 캄캄하다...이럴때에는 모세같은 지도자, 사사시대의 사사, 왕정시대의 다윗같은 걸출한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하여 회복시켜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활동하던 시대 이스라엘 유다를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400년간이나 침묵하신 침묵기, 역사적으로는 로마의 압제하에 소망이 보이지 않는 시기, 이런캄캄한시기에 믿음의 사람은 보는 눈, 생각하는 생각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명이 밝아올때가 되었구나, 하고 더 주님께 집중합니다. 세례요한이 구원자, 메시야 오실길을 미리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코로나19로 캄캄한 이시대 믿는자가 무엇을 준비해할 것이지, 교회가 추락하고 하나님이 모독을 받는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를 전할 전도자들이 무엇으로 영혼을 향해서 나아갈 것인지 깨닫는 복된시간 될 수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주님오심이 가까운 시대의 징조가 있습니다. 역사, 시대를 보는 눈을 가지자!

    눅3:1절 세례요한이 활동하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이 등장하는 시대인데요. 이때의 시대적 상황을 누가는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로마 디베료황제 통치시대, 유대총독은 본디오빌라도이다. 헤롯, 빌립, 루사니아는 지역분봉왕이다. 그리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다. 당시대 정치적 종교적 배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 역사가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유대는 로마통치아래 식민지상태구나. 주권이 로마에 있구나, 그런데 문제는 대제사장입니다. 서열을 보십시오. 황제-총독-분봉왕 그리고 대제사장입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종교적 독립기관이어야하는데, 정치적으로 황제 총독 분봉왕의 수하처럼 정치 행정의 수하처럼 아래에 있고, 임명권 역시 유대총독이지명하여 종교가 정치의 하수인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율법에는 대제사장이 죽어야 차기 대제사장이 선임 되는 것인데, 대제사장이 동시에 두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가 권력에 아첨하는 모습이며, 종교가 임명권자인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있는 것으로 제사제도가 붕괴되었다는 말입니다.

    민35:28절,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할 것임이라 대제사장이 죽은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이런데 대제사장이 둘이면 자유케 되는 율법조항에 혼선이 오게 되는 것이며 특히 눅3:2절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때...여기에서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으로 섭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혼란을 일으킬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주는 교훈은 세상권력이 종교를 하부조직에 두고 마음대로 임명할경우 종교는 권력자의 눈치를 보고 종교는 타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세상 정치 권력이 두려워 종교가 힘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현대교회사에서도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일제 36년 식민지시대, 교단 총회가 권력에 무릎을 꿇고 신사참배를 결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등 정치 권력에 아부하고 종교의 독립성이 훼손될때, 이런때가 바로 종교의 타락뿐만 아니라 세상 역시 점점 암흑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코로나19같은 혼란의 시대, 교회는 권력의 눈치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독립성을 회복하고, 자발적으로 국민건강에 힘쓰고 기도해서 그래도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이요, 예수그리스도가 답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생명을 전하는 교회가 생명을 위협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세상권력의 통제를 받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며, 이런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더 철저해야 합니다. 세상권력 정치가 종교를 마음대로 움직일때 그것은 바로 시대적인 암흑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임하심을 보면 하나님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수있습니다.

    눅3:2절,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합니다. 빈들, 광야, 고립된 곳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제사장이고, 어머니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혈통을 따라 주어지는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성전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아닌 빈들 광야에 있었을까? 성전제도, 제사제도가 무너져 요한은 성전은 있을수없었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위해 빈들에 있을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이들을 성경에서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곳이 호렙산 떨기나무, 시내산, 광야, 빈들입니다. 성전이 타락하고 세상 권력이 종교를 좌지우지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빈들 광야로 나아가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요한, 그렇다면 요한의 사명은 무엇인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는 일...곧, 주님 오실길을 예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심령 심령 마음에 모실수 있도록 마음을 개간 여는 일...그것이 요한의 사명이지요. 사40:3, 눅3:4절 이하인데요.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하는 것이지요. 슥4:7절, 큰 산이 스룹바벨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러면 이 평안한 길을 따라, 평지를 따라...주님이 살포시 밟고 오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빈들일지라도 초막일지라도 광야일지라도 세상권력을 뒤로하고 주님만 생각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임하며, 이런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3.요한이 이 일을 하기 위해 외치는 주제를 통해서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1)선민의식, 그것이 구원을 주는 것 아니다! 유대는 혈통주의인데,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다 하나님의 자녀인줄 압니다. 그런데 정통주의 유대사관에 폭탄을 던지는 것입니다. 7절, 독사의 자식들아! 물론 예수님도 마23장 화있을진저의 장에서, 마23:33절, 뱀들아 독사의 새까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하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실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눅3:8절,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오랫동안 굳어있던 선민, 혈통주의에 포탄을 던져 관행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가 다르잖아요. 마태복음은 유대인

    중심에게 던지는 메시지여서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일단 대상자가 이방인이잖아요. 예수님의 혈통은 낳고 낳고의 하향식이 아니라 위로 위로 올라가 하나님이시다. 더군다나 우리 조상 역시 위로 위로 올라가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브라함의 후손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되느니라! 하시면서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2)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의 백성인가?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칩니다.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습니까?

    옷두벌있는자는 - 옷 없는자에게 나눠줘라/ 먹을것이 있는자는 - 나눠줘라 / 세리들아-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어 착취하지 말라 / 군인들아 - 강탈하지 말고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급료를 족한 줄로 알아라!

    이 내용들은 선행, 행실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 열매를 맺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의 기록순서를 잘 보십시오. 시대적 시간적 순서와 상관없이 20절 세례요한의 옥에 갇힌 기사를 기록합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의 사역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이 의미는 세례요한이 바로 율법의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외친 회개의 열매, 선행, 구제는 율법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에 합당한 열매, 선행과 구제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사람에게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선행을 쌓고 쌓다가 결국 나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고, 율법이 나를 정죄하여 죽을 수 밖에 없구나! 나의 구원자는 누구인가? 나를 도우소서! 하면서 구원자 메시야를 대망 기다릴때 빛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5장에서 나는 참포도나무여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예수님께 붙어 있는 자, 예수를 믿는 자, 예수안에 있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럼, 세례요한이 외치는 선행의 열매는 아무 필요가 없는가? 아닙니다! 이것을 행함으로 우리 안에 있는 높은 산, 깊은 계곡, 모가 난 성격들이 평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받아들일 마음밭이 일구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외친 회개의 열매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예비사항입니다.

    또한,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구원의 조건으로 열매를 맺으려고 몸무림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소개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다듬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가 이런 작업이 없으면 무엇으로 세상 사람과 구별할 것이며, 예수믿는 향기가 어떻게 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열매가 없으면, 옛날 그 모습 그대로이잖아요. 이 모습이 바로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주님을 소개할 수 가 있습니까?

    선행의 열매, 회개의 열매는 주님을 소개하는 복음전도자로서 마땅히 구비해야할 덕목입니다.

     

    오늘 세례요한이 살던 시대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 세례요한의 외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가? 세상물질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하나님의 음성에 기울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가? 나는 복음을 전하는자로서 예수믿는 향기를 발하고 있는가?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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