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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눅4:14~30 예수님의 자기증명(복음)에 대한 반응(칭송과 배척)
    신약 강해/4복음서 2021. 2. 22. 08:41

    눅4:14~30 예수님의 자기증명(복음)에 대한 반응(칭송과 배척)

    지난주 예수님의 시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거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 시험의주제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였는데요. 말씀으로, 그리고 사명으로 승리하시고...삶의 터전, 사명지로 돌아오십니다. 광야에서 고향으로 돌아오실때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여러분, 성령충만, 성령의 능력을 받으려면 예수님처럼 40일 금식하고, 기도해야 할까요? 물론 나를 부인하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기 위함의 몸부림은 필요하지만, 능력받기 위한 금식과 기도는 자신을 과시하는 자신을 드러내는 자신의 노력일 뿐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오직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요3:31절 이하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하나님이 보내신 이 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 오실 때 하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주님을 고백하는자, 주님을 영접하는자에게는 이미 하늘 문이 열려 있고, 눅17:21절말씀처럼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고, 엡2:6절 하늘에 앉히시니..하늘에 앉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더 고백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면 성령님은 우리안에서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능력과 함께 광야에서 돌아오신 예수님의 행적과 시험에서 이기신 후 첫 사명감당의 모습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점검하는 그리고 사명을 불태우는 귀한 시간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의 사명, 그리고 우리의 사명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을 자랑하는 것이다!
    눅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셨다!
    그리고 사61장을 인용하시는데 눅4:18~19절 말씀입니다. 성령충만, 성령의 능력을 받은 자,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사명이 있습니다. 

    1)성령이 임한 자의 첫번째 사명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선지자는 구원과 회복을 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 말하였습니다. 복음이란 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은 자신이 가진 문제 의식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픈 사람은 병이 낫는 것이 좋은 소식이고, 수험생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좋은 소식이며, 취업을 준비중인 사람에겐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소식은 언제나 한 가지만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에게 복음 곧 예수님이 답입니다. 
    이는 역시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 잘 나타납니다. 가난한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자신에게 없지만 자신에게 있는 것을 그에게 주겠다고 말하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말하였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은이나 금이나 떡이 아니라 예수님을 준 것입니다. 가나한 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먹고 다시 주리는 세상의 양식이 아니라 한번 먹으면 영원히 주리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가난한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기진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겨 우리의 이웃에게 자신을 허락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이사야는 구원과 회복이 일어나는 때에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통해 포로된 자가 자유를얻게된다 말합니다. 그래서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기다렸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 직분에 기름을 붓게 하였습니다. 첫째는 제사장이고 둘째는 왕이며 셋째는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기름이 부어졌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사야의 말대로 기름부음 받은 자가 오면 포로된 삶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 죽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더 잘 태워지도록 기름을 발랐는데 이 모습이 마리아를 통해 재현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 말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가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 말을 하며 이 행동이 옳은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예수님이 죄로 인해 포로된 자를 위한 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름 부음 받아 제사장이며, 왕이며, 선지자인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자신의 생명을 죄인들에게 주십니다. 이로 말미암아 포로 된 자들은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과 회복은 총과 칼과 힘과 돈에 있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죽음과 대속하심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밖에 없습니다. 

    3) 또한 이사야는 구원과 회복이 일어나는 때에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한다 말합니다.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자를 눈 먼 자라 말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9장 40-41절은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는 것을 눈 먼 자라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눈 먼 자였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행위가 하나님을 만족시킬 것이라 생각하며 죄 없는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본다고 생각했던 바울이 눈 먼 자임을 깨닫게 하였고 그의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며 다시 보는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된 바울은 이전에 보지 못한 예수님을 말씀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오늘 본문과 같이 사람들이 성경을 읽었을 때 그 말씀이 예수님에 대한 것임을 전했습니다. 아담이 오실 자의 모형이며, 아담과 하와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담고 있고, 율법이 그림자며 그 안의 먹고 마시는 것, 절기와 초하루, 안식일 등이 모두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눈 먼 자에서 다시 보게 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희미한 것이 선명해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안경을 쓰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을 열심을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 또한 구원과 회복이 일어날 때 이사야는 눌린 자가 자유롭게 된다 말하였습니다. 뱀의 말대로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이란 존재는 이후에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과 악의 판단 아래 언제나 악으로 드러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악으로 드러난 자는 결코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선이 되기 위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갑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구원에 이르기 위해 율법 앞에 땀 흘리며 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사람의 행위는 결코 선으로 결론 지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동굴처럼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었습니다. 살기 위해 주어진 율법에 짓눌려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졌습니다. 이로말미암아 율법의 요구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쉼의 자리로 불러주었습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쉽고 가벼운 예수님의 짐을 메라 말씀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짐은 결코 쉽고 가볍지 않습니다. 율법을 완성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쉽고 가볍다 말씀하신 것은 그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들고 가던 우리의 십자가를 예수님이 함께 들어주심으로 쉽고 가벼운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짓누르던 율법의 요구에서 자유를 얻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곁을 걷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깊은 수렁에서 
    우리의 안내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는 때에 위와 같은 일들이 다 일어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흔히 야훼의 날로 이해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은혜가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61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읽지 않은 뒷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더불어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 선포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복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행한 것과 관계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보복은 행한 것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두 개념은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두 개념이 여호와의 날에 모두 이루어집니다. 죄를 행하여 보복 받을 자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죄값을 치루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은혜와 보복이 이루어지는 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은혜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슬퍼하는 자에게 기쁨을 허락하고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혀주는 그 날을 소망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이 복음을 나타내주시고, 구원자 메시야임을 드러내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때요?
    22절,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존에 가르치던 자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말하였습니다. 이를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인 공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또 다른 성품인 은혜를 말하였습니다. 사람의 열심과 노력 그리고 행위와 상관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는 못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태복음 7:28-29에서 말하는 것처럼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옳게 해석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한 곳이 예수님이 자란 나사렛의 회당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모인 자들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자라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말씀으로 예수님이 자신을 증거하였음에도 두 눈으로 보고 또한 경험한 것을 더 의지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 예수님이 왔다는 말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냈고 산 낭떨어지까지 끌고가 밀쳐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이미 나사렛에 도착하기 전부터 예수님은 사람들의 반응과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적당히 사람들이 원하는 말을 하여 그들의 미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귀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님은 험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로 걸어갔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피하지 않고 그들 사이로 걸어 갔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할 수 있고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앞에 사람들은 칭송과 배척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자기에게 이로우면 칭송이요, 자신의 뜻과 다르면 배척하는 자기이기주의자들, 이런자들에게 죽음을 당하실것을 미리 아시고도 그들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 이것이 바로 복음이요 예수님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 은혜로 복음의 사람이 된 우리 역시 이 길을 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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