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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눅7:18~50 흔들리지 않는 신앙,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합니다!
    신약 강해/4복음서 2021. 3. 17. 08:41

    눅7:18~50 흔들리지 않는 신앙,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신앙

    흔들리지 않는 신앙 제목을 정하면서, 찬송가가 아닌 가요가 생각났습니다. 80년대 윤수일이라는 가수가 있었는데 그분의 히트작이 아파트였는데, 그때 당시 참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어디를 가도 아파트 노래였던것같은데, 가사가 이렇습니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부는 갈대 숲을 지나...여기에 갈대 숲이 나오잖아요? 갈대처럼 믿음이 흔들리면 안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을 향한 세례요한의 신앙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믿음 강하다고 자만하면 안됩니다!
    눅7: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세례요한은 헤롯을 실랄하게 비난하므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수감되어 있는 세례요한에게 제자들은 요즘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 소문들을 보고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아~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그 놀라운 메시야 사역을 하시는구나! 맞아, 하면서 하나님께 두손들어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그러면 메시야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하늘의 놀라운 권능으로 자신을 빼내어 줘야지 기대하는데 아무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시이오니이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에 대한 답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메시야 그리스도인 것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겁니다. 맞는가? 아닌가? 내가 잘못알았나?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세례요한을 비난하기 보다 당시대 사람들의 신앙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심지어 장례를 치르고 있는 나인성의 청년을 살리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눅7:16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도다! 예수님을 선지자중의 뛰어난 선지자로밖에 안본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에 능통한 당시대 유대인들이, 율법에 능통하다는 것은 메시야가 오실때 그 분은 소경이 보고, 저는 자가 일어나며, 죽은자가 살아난다는 예언을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메시야가 오실때 나타날 징조를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다 행하고 계시면, 아 이 분이 약속하신 그분이구나! 믿어야 하는데 아무도, 하물며 세례요한마저도 믿음이 흔들려 재차 묻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7:9절에서 로마군대백부장을 향하여 이렇게 칭찬하셨잖아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예, 예수님을 이렇게 믿는자가 없어요! 그래서 한탄하고 계신것입니다. 율법은, 말씀은, 잘 기억하고 있지만, 그 말씀을 이루시는 그 분이 오셨는데도 믿는이가 없구나! 제발 믿는 자가 되어라는 강력한 질책의 메세지입니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내버려두고) 세례요한은 왜 흔들렸을까요? 세례요한이 누구입니까? 광야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수많은 무리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며 회개를 주었던 이, 더군다나 예수님을세례주었을 때, 신묘한 체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주요 메세지는 독사의 자식들아 심판이 임박하였으니 회개하라.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날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 심판할 날이 가까이 왔으니 죄인들은 반드시 심판 받을 것이라...그의 메세지의 중심을 아시겠습니까? 죄를 책망하고 죄인의 심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죄인들, 독사의 자식들 불심판을 받을것이다! 그렇게 기대했는데, 그래서 헤롯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감옥까지 왔는데, 기대한 예수님이 로마군대를 불심판하시지도 않고, 자신을 꺼내주지도 않고, 오히려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같이 먹고 마시니...세례요한의 관점, 구약의 관점으로 보면 이상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것이지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답은 이렇습니다. 무엇을 보기 위해 광야에 나간 것인가? 를 물은 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굳은 믿음과는 정반대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관용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세례자 요한이 믿음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례자 요한을 포함한 이스라엘 중에서 이방인이었던 백부장보다 더 나은 믿음을 가진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을 가리켜 28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는 없다 말씀하시며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 보다 크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백부장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서 구약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백부장은 결코 세례자 요한보다 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부정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새 생명을 얻어 살게 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백부장이 세례자 요한보다 큰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철저한 순종과 헌신 그리고 많은 봉사와 희생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을지라도 그것은 평가의 기준이 되지 못 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의지하는 자는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슬퍼하며 이를 갈게 됩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인 믿음을 가진 자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며 그곳에서 큰 자로 살게 됩니다. 
    세례요한과 백부장의 믿음을 통하여 구약의 율법적 관점으로, 죄를 심판하는 정죄의 관점으로는 주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 관점으로는 말씀을 많이 알고 있으니 믿음이 좋은 자처럼, 신앙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종교인일뿐입니다. 오늘날 종교인인 기독교인, 교회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말씀을 몸으로, 행함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처럼 한 말씀 한 말씀에 생명을 걸고 나타내는 사람, 믿는 자가 얼마나 될까요? 믿는자가 적도다 주님의 탄식을 바라보면서, 믿는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당시대 종교인 바리새인을 바라보면서, 정죄와 판단이 신앙의 최대 적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대 종교기득권자들은 제사장 그룹,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들입니다. 이들의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선망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실랄하게 비난하셨지요. 백성들에겐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았는데, 왜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을까? 이들은 기도도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하고, 율법도 많이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를 향유를 부은 여자의 모습속에서 설명해주십니다.
    바리새인, 종교인들의 특징을 보십시오. 눅5:21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면서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신성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하고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6:11절, 안식일에 손마른 환자를 치유하셨을때,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오늘 본문 말씀 7:39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7:49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이들의 특징은 자기들 끼리 있을때는 예수님을 죽일 모의, 논의를 하고, 사람들 대중앞에서는 속으로, 마음으로 예수님을 비난 정죄,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잔치에 초청하고, 예수님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사람들과 같이 있고, 한마디로 겉으로만, 형식적으로만, 신앙인인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교회에 무차별적인 말의 공격, 댓글의 공격이 있습니다. 저 역시 비난에 있어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판단과 정죄는 주님의 몫이며, 우리가 판단자, 심판자 위치에 있으면 예수님시대의  종교인들과 별반 다를바 없다는 사실입니다. 약4:11~12절,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 마음의 생각이 판단과 정죄의식으로 가득차면 분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과 복음이 가득차서 “주여 이 땅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땅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애통이 터져나와야 합니다. 

    3. 향유를 부은 여인을 통하여,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자 가 됩시다. 
    36절 이하에 보면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 일행을 초청하여 대접을 합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 초청받지 않는 한 여인, 성경은 표현하기를 37절,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여인을 창기라고 합니다. 이 여인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주님께 향유를 다 붓습니다. 이 상황을 참 자세히도 묘사하는데요. 38절,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다른 사람들은 이 여인이 어떤 여인인줄 알기 때문에 다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42절, 빚을 많이 진 자와 적은 자를 탕감해줬다. 이 여인은 많은 빚을 탕감받은 자의 심정으로 주인을 섬기고 있다. 탕감받은 그 은혜를 감당할 수 가 없어서, 자기가 가진 전부를 바치면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고 합니다. 그러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모습의 핵심은 주님을 더 사랑하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 여인처럼 죄에 대한 통렬한 회개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수치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 앞으로 나아가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죄를 감추고 감추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죄는 드러낼때, 반대로 은혜는 부어지는 것입니다. 죄가 크면 클수록, 주의 은혜는 넘치고, 동시에 주님을 향한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놓은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잔치를 베푼 바리새인은 종교인처럼 예수님을 대하였지만 진짜 주님을 대접한 사람은 죄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처럼 오늘날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가진것 없고, 드릴 것 없지만, 이 여인처럼 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백부장의 믿음이며, 하늘에서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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