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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1~10(32) 진정한 기쁨신약 강해/4복음서 2021. 8. 16. 20:18
눅15:1~10(32) 진정한 기쁨
경제용어가운데 한계효용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많으면 많을수록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배고플때 먹는 사과 하나의 만족감과 배불리 먹은 상태에서 사과 한개먹을 때의 만족감과 가치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농산물 풍년이 올때 좋은 것이 아니라 가치가 떨어져 오히려 갈아엎는 것들을 볼 수 가 있습니다. 많은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라는거죠. 또 이런말도 있습니다. 상품이나 직장이나 기업을 볼 때 미래가치, 성장가능성 이라는 말을 합니다. 지금은
별볼일없어 보이는 어떤 것이 미래에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보면 남들이 관심을 가지기 전에 투자를 하는 것이지요. 10년 20년전에 애플, 테슬라…네이버, 카카오…누가 관심이나 가졌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최고의 가치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잖아요. 세상적, 경제적 법칙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15장의 예수님의 비유는 이런 세상적 경제적 법칙과 상반된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의 비전, 또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마인드를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과 가치를 주님이 보여주신 가치를 따라 무엇이 소중한것인지 깨닫는 귀한 시간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 비유를 듣고 어떤 마음이 드는가? 여러분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15장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교제를 합니다.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기도 하시고, 그들을 치유해주시기도 하시고,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사찰하듯이 감시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속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난하기를 눅15:1,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립니다. 이 소리를 들은 예수님께서 3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온 자이며,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구원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십니다. 3가지의 비유에서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이 누구를 뜻하는가?
4절, 양 백 마리를 가진 어떤 사람이 한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흔아홉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가서 기어코 찾아 돌아왔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경제적 계산을 할 수 있습니까? 아흔아홉마리가 더 중요하지, 한 마리 찾으러 갔다가 나머지마저 뿔뿔히 흩어지면 어쩌려고…, 세상적 일반적 지식과 이론으로는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어찌보면 잃어버린 한 마리양, 가장 작고, 흠이 많고, 보잘것 없을 수 있습니다. 과연 이 목자에게 그렇게 소중한 양이었을까요? 99마리보다 가치있을 수 없어요. 있어도 고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렇게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둘째 비유, 8절,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10개 중의 하나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가치가 점점 더 강하게 오지요. 100개중의 하나보다, 10개중의 하나가 더 가치가 있잖아요.
세번째 비유는 13절 말씀인데 둘째 아들이 유산상속받은 것들을 다 현금화 해서 먼 나라로 떠나버렸다. 두 아들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린것이지요.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 특히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잃어버린것들에 대한 경각심과 소중함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점점 강도를 더하는것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잃어버린것에 대한 공감, 소중함을 모릅니다. 왜 그런가하면…잃어버린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르니까 …잃어버린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니까, 또 하나는 주인을 잃어버린 당사자가 아니니까…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별 감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비유를 듣고 어떤 충격이 옵니까? 무감각하세요?
2. 잃어버린 주인의 마음은 어떨까요?
백 마리의 양 가운데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목자의 마음…아흔아홉마리를 남겨두고 그 한마리를 찾아나섰다! 이모습에 경제적 원리를 들이댈수가 없습니다. 별가치도 없고, 가격도 없는 양이라고 필요없다고 할 수 도 있겠지만 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무모할정도로 찾아나섭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목자에게 양 한마리 한마리는 자신의 전부입니다. 5남매를 둔 부모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4자녀는 다 학교가고, 걷지 못하는 소아마비 아들이 방안에 있는데 불이 났습니다. 밖에 돌아온 엄마가 무엇이 생각나겠습니까? 다른것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불 속에 있는 그 아들 밖에 없는겁니다. 다른 아들은 어쩌고요? 그런 이론적, 지식적, 계산적, 경제적 생각이 없어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세상적 가치는 없지만, 주인인 목자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한마리 양을 찾았다고 그 양의 몇 배의 돈을 들여서 잔치를 하잖아요. 열드라크마 가운데 하나의 동전을 잃어버린 여자는 어때요? 한 드라크마 은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은전이라고 해서 오늘날 가치로 보면 노동자 하루 품삯(=데나리온)입니다. 가치로보면 어찌보면 크고, 어찌보면 작다고 할 수 있지만, 열 드라크마를 받은 이 여인은 신랑될 약혼자로부터 받은 은전이라면 어떨까요? 유대의 결혼풍습은 남자가 여자에게 약혼선물로 열드라크마를 주고, 여자는 이것을 반지나 머리띠 목걸이등 장식품으로 만들어서 정혼자의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를 잃어버리면 거의 파혼수준이잖아요. 일반인에게 경제적 가치는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이 여인에게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인생의 전부인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찾아서 그 찾은 기쁨을 찾은드라크마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서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잃어버린 아들, 탕자의 비유는 어때요?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를 다 들어줍니다. 그런데 아비의 마음과 달리 이 아들은 재산을 다 가지고 타국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옵니다. 탕진하고 실패하고 돌아온 이 아들을 아버지는 그대로 받아주고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하면서 기뻐합니다. 이웃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같이 사는 첫째아들마저 이해하지 못하고 왜 그러시냐고 아버지에게 항변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첫째 아들이나 실패한 둘째 아들이나 다 소중한 아들임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부모, 주인은 모든 것이 다 소중하고 귀합니다. 이 주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는다면 잃어버린 것들을 찾은 다음 과할정도로 기뻐하고. 과할정도로 잔치하는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가 되리라 봅니다.
3. 잃어버린 당사자가 우리자신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잃어버린 양…앞에 동료, 형들을 잘 따라가다가 맛있는 풀 한번 더 뜯어먹으려다 일행을 놓쳐버렸습니다. 여기인가 저기인가? 찾아헤메다가 더 멀리떨어지고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다 가시에 찔리고 넘어져 결국 스스로 일어설 힘마저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죽었구나! 울다가 지쳐 소망이 없는 그때 주인의 발자욱 소리가 나고 찾았다고 메고 가는겁니다. 주인의 기쁨보다 더 기뻐 펄쩍 펄쩍 뛰고 싶은 이 한마리 양..이 바로 우리자신
이라는 겁니다. 7절, 이와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우리가 이런 존재였구나! 죽을수밖에 없는데 산가시에 찔린 목자, 우리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구나! 이 마음이 들면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그리고 주님앞에서 기뻐하지 않을까요?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똑같은 동전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예물을 받은 신부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중한 존재이구나, 우리는 보석같은 존재, 꼭 필요한 존재…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존재감이잖아요. 세상사람이 볼때 부족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주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그래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아멘
세번째 탕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유산을 달라고 하고, 받은 땅을 다 현금화해서 아버지곁을 떠나 세상적인 타국에 가서 그 돈마저 허랑방탕하게 다 낭비해버립니다. 13절, 허랑방탕, 낭비, 14절 궁핍…허랑방탕=무절제, 낭비/ 낭비(허비)=흩뿌리다, 분산 / 궁핍=부족하다, 너무 늦었다…
그리고 15절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콜라오-결합하다, 달라붙다, 부착하다…아교로 붙이다..그 이방사람에 붙어있다. 세상논리 세상적으로 살았다. 모든 행동논리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세상적이 되었다. 똑같이 되었다. 노아시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의 딸들과 결혼하여 똑같이 되었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다 음란하게 살았다. 둘째 아들에게 구별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들보다 더 비참하게 나락으로 빠져들어 한계점에 다다랐습니다. 이때, 이 아들이 자기 스스로 뛰쳐나왔던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17절,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아버지집이 생각나면서 내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구나! 하면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이 아들이 누구입니까? 아버지를 떠나 말씀을 떠나 세상에 붙어서 세상적으로 정욕적으로 욕심과 탐욕으로 살아온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잃어버린 양, 드라크마, 둘째 아들…이 우리자신이라고 여겨지면 이런 우리를 찾아나서고 기다려주신 주인, 하나님…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의 고백과 기도는 다른것이 필요없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세상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붙어있기 원합니다. 아멘…여기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 아들이 바로 세리와 죄인들과 여자들이니라 하시면서 비유를 설명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저런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교회도 우리도 바리새인의 마음이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담배피는 사람은 교회오면 안되/ 술먹는 사람 교회오면 안되/ 우리
주님은 이들을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막아서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죄인이 돌아와 회개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는 곳이 교회요, 우리 역시 이런 넓은 마음으로 세상사람을 바라보면, 우리의 할일이 너무 많은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 비전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며 이웃을 품을 수 있는 넓은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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