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빌1:12~21 믿음의 진보
    신약 강해/바울서신 2020. 12. 21. 11:46

    빌1:12~21 믿음의 진보
    코로나19바이러스 사태가 교회에 엄청난 시련을 주고 있습니다. 신천지를 중심으로 확진자가 확산될때는 이단들
    에게 경종을 주는구나~ 또 신천지가 이단이구나~하는 이단을 드러내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은 교회와 목사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어 교회와 목사 크리스찬이 매도를 당하고 교회의 신뢰도가 땅에 추락
    해버렸습니다. 전광훈목사를 중심으로한 태극기파의 오만한 모습이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이런 때에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이웃은 전도대상자입니다. 이들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바이러스의 주
    범이 되어서는 안되고, 교회가 바이러스의 온상이 되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역수칙을 준수하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종식을 위해서 더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모이는 예배의 제한으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질때에, 믿음의 진보, 믿음이 전진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에 대하여 나누려고 합니다. 
    1. 신앙과 행위를 판단하는 잣대가 있는데 그것은 복음전파가 기준입니다.
    빌1: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이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13절, 14절, 17절, 계속 나오는 단어입니다.  나의 매임, 로마 감옥에 갇힌일
    입니다. 복음 전하다가 투옥된 일인데, 복음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가 큐리오스 주입니다. 주를 믿어야 구원받습니
    이잖아요. 로마시대 주는 로마황제입니다.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시대에 사도바울은 거침없이 담대히 당당하게 
    예수가 큐리오스 주입니다. 그러다가 투옥된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파급효과, 영향력이 무엇인가하면, 바울이 선포한 큐리오스 예수그리스도가 로마의 큐리오스요 신인
    가이사보다 약한 것이 아닌가? , 로마의 신에게 패배한것인가? 라는 빌미를 주어 예수믿는 자들이 패배의식을 가
    지게 되고, 더군다나 어린신앙은 흔들릴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 복음전파에 진보가 되었다입니다. 감옥에 갇히므로 인하여, 감
    옥을 지키는 로마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재판과정을 통하여 복음전하다가 갇혔으니 복음이 무엇인지
    변증하고 확증하고 간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도리어 좋은 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힌 일은 좋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이 잘못되었다. 아니면 복음전도의 방법이
    잘못되었다 고 판단할 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실패같은 모습, 그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신앙과 행위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눈으로 보기에 실패한것같지만, 그 매임, 투옥이 오히려 복음
    전도의 장이 되었으니 오히려 유익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태극기파의 중심인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을 자칭 선지자라고 하면서 따르는 분들이 많은데요. 이 분이 감옥에도 갇히고, 보석으
    로 풀려나왔다가 815 광화문 군중집회에 참석하고 결국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 격리되었습니다. 이분을 따르는 분
    들은 여전히 이분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정부에서 강제 격리하고, 코로나 테러라고 합니다.
    그럼, 이분의 행위가 정당한지 판단을 해보세요.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감옥에 투옥될 때에 이모습이 실패인지 성공
    인지 판단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 판단의 기준은 복음전파의 진전이 있었느냐? 복음전도에 진보가 되었느냐?입니
    전광훈 목사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유익하고, 예수그리스도가 알려지고, 많은 분들이 잘했다고 합니
    까? 오히려 복음의 장애가 되고, 예배에 통제가 되고, 교회가 땅으로 추락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모독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복음전도에 진전이 아니라 후퇴, 복음전도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잘못된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삶의 행위에 대해서 지침을 주십니다. 모든 행위와 신앙은 복음전도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 
    복음이라면 양보할 수 있고, 복음때문에 포기할 수 있고, 복음때문에 감옥에 갈수도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물질때문
    에, 내 야욕때문에, 내 정치때문에 감옥에 가는것은 하나님앞과 사람앞에 결코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2. 나의 신앙과 행위가 복음전도의 열정을 일으키는가 아닌가로 판단해야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
    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절, 어떤이는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는 착한 뜻으로...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바울의 매임이 어떤 효과를 일으켰는가? 복음을 전하면 바울처럼 감옥 들어가야하고, 고문받아야되...
    그래서 복음전도에 위축이 오고, 두려움에 지하로 숨은것이 아니라,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더욱 확실,확고
    해지고 겁없이 복음을 담대히 전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글의 핵심은 여러분, 내가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다고 복음
    전도에 위축되지 마십시오. 겁없이 전하는 사람들처럼 굳건히 서서 담대히 선포하십시오. 독려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도하는데 투기와 분쟁으로, 17절,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18절 겉치레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옳지 않은 동기로 전도하는 자들인데요. 이들은 바울과 인간적으로 대립되어 있던 사람들, 바울의 반대편
    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조용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요란하게 시끄럽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로마관원들
    을 자극해서 복음전하는 대표자인 바울에게 핍박을 더 가중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투기와 분쟁으로 문제를 일으켜
    재판과정에서 바울에게 불리하게 적용되게 하는 것이지요. 이런자들에게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이래나 저래나 그래도 예수를 전하니...18절,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가지 교훈을 제시합니다. 첫번째는 나의 행동이 나를 아는 누구든지에게, 찬티가 되었든 안티가
    되었든지간에 복음전도의 열정, 구령의 열정을 일으키고 있는가?입니다. 스데반을 생각해보세요. 사도행전7장에서
    스데반집사가 강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대 유대인들에게 가히 혁명적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성전모독같은 발언을 거침없이 전하고 돌에 맞아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 사건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아~ 스데반때문에 우리 다 죽게 생겼다 하고 불평하던가요?
    오히려 흩어지면서, 도망다니면서 복음전하지 않던가요? 복음의 불을 일으킨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그러므로 스데
    반의 죽음은 주변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의 열정을 일으켰다! 바른 행동,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행동을 보는 이와, 나의 말을 듣는이에게 이렇게 복음의 열정을 일으켜, 그래 신앙생활 잘해야겠다는 결단을 일
    으키는 자가 되어야지, 아휴 저렇게 살면 안되하는 손가락질을 받아서는 아니되옵니다.
    두번째는 내 생각으로 상대방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바울 보십시오. 자신에게 더 큰 죄를 지어줄
    목적으로 복음을 요란하게 전하고, 바울보다 더 잘하려고 시기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하여...그러면 안돼~~라
    하는것이 아니라, 그래도 결론은 복음전도요 예수를 전하니...나는 기뻐한다. 나는 환영한다.하면서 관용을 보여주더
    라..우리는 여기에서 내 중심으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나쁜놈~ 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생각하
    니까 기뻐할 수 있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현시국을 보나, 우리나라 초대교회를 보나, 교회의 역사가 분열과 다툼의
    역사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나누어지듯 교회역사가 그래요. 교회가 나누어지고 교단이 나누어지는 것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서로가 나누어져서 전하는 것은 복음이잖아요. 그래서 각 교단들이 각 교회들
    이 부흥되고 오늘날까지 이른것입니다. 그래서 나누어지는것은 바른것은 아니지만, 나누어졌다면 상대방을 주저앉
    히고 비방하는 것을 내려놓고 복음에 초점을 맞추면 또 하나님이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 되
    면, 복음만 바라보게 되니까...그들이 하는 일들, 좋게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중심되면 신앙은 자연스럽게 진보, 전진한다는 것입니다.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로마서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
    이라...주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그를 만유의 주로 고백하여 이름을 선포하고 높이겠다는 결단입니다.
    사49:23 네가 나를 여호와인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직 
    주를 바라는 자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부끄럽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무엇때문에 이루어주신다고요? 주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중심의 신앙이기 때문에 주님은 약속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중심의 신앙이 되면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자연스럽게 신앙의 진보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중심의 신앙이 되면, 20절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구원인데.. 이 구원 소테리아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
    니다. 첫번째는 감옥에서의 구출, 무죄석방,  질병에서의 구출, 육적인 구원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의미는 죽음이후
    주님품에 안식하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중심의 신앙인은 이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내 중심이 아니라, 그리
    스도 중심이 되어...이렇게 고백되어집니다. 20절후반절,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요.
    21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이 두 구절의 핵심은 나의 삶의 주관자 그리스도!
    나의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스도...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전적인 헌신입니다. 
    그리스도 중심, 사나 죽으나, 항상 주님만 생각하면, 내 믿음이 있는것인지? 신앙이 자라는지? 능력이 있는지?
    잡히는 것 없는 것 같지만, 진보, 진전,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여전히 정체되어있는것 같지만, 아니
    오히려 믿음이 떨어진것같지만, 그리스도중심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자라고 있으며
    엄마품에 안긴 아이처럼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언제 나타나는가?
    남이 나를 보고 “그리스도인, 예수쟁이네~~~” 
    어떤 칭찬받을 일을 하고 난 후에 내가 한것이 아니요 “주님이 하셨습니다!”가 자연스럽게 나올때 믿음의 수치가 
    나타납니다. 참 복음전도의 길이 막히고, 하나님의 이름이 수치를 당하는 이때에, 그래도 예수밖에 없으며,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라는 고백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라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 갈것
    입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